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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제보다 나은 오늘 Mar 03. 2024

텍사스 전기톱 영화에는 전기톱이 나오지 않는다

제발 용어 좀 잘 쓰자

 선혈이 낭자하는 그 특유의 잔인함과 속도감 있는 숨 막히는 연출로 "현대예술작품"으로까지 추앙까지 받은 영화 "텍사스 전기톱 학살(한국 번역 제목. 원제 THE TEXAS CHAINSAW MASSACRE)". 누가 선정했지는 모르겠지만 "죽기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에도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유명한 영화다.


https://pedia.watcha.com/ko-PK/contents/m5m64gW


 공포영화 및 고어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모를 수 없는 고전 중 고전이며 수없이 많은 클리셰를 창출했다. 원작의 작품성 및 인기에 힘입어 속편도 많이 나왔다.


 나는 공포영화나 고어물에는 그다지 취향이 맞지 않는 사람인데, 왜 느닷없이 이 영화를 소개하냐면 이 영화 때문에 한국의 공구시장 언어가 심각히 망가져버렸기 때문이다.(한 마디로 공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매우 불편하다.)


 결론부터 강조하자면, 이 영화에는 "전기톱"이 시작부터 끝까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원제도 "Chainsaw"라고 해놨구만 누가 이걸 지맘대로 "전기톱"이라고 번역했나 모르겠다. 제대로 번역하면 "사슬톱"이 맞겠으나, 이건 사회에서 거의 쓰지 않는 용어이니 "체인톱" 또는 "기계톱" 정도의 번역이 적당했겠다. 왜 원작 제목에 있지도 않은 "전기"를 맘대로 가져다 붙였을까. 그 폐해로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체인형태의 톱날이 있는 절단장비"를 모두 "전기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용어의 정의부터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가자.



 먼저 영화 제목에 사용된 "전기톱".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전기톱" 예시


 공구시장에서 "전기톱"이라고 부르는 공구는 위 사진의 왼쪽처럼 상시 전원을 연결해서 쓰는 타입과 오른쪽처럼 고밀도 배터리를 결착하여 사용하는 이동식 타입이 있다. 즉, 전기톱의 구동에너지는 "전기"임이 명확해야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손잡이 부분에 "엔진"이 없으며 전기구동 "모터"와 "배터리(이동식에 한함)"가 있다. 배터리가 없는 전기톱은 전력코드 반경 이상 이동할 수가 없다.




 이번에는 "엔진톱".

 긴 말 필요없다. 딱 봐도 손잡이 부근에 "엔진"이 장착된 톱이다. 영화에 사용된 톱은 이런 유형의 톱이며 엔진이 작동할 때의 굉음도 영화의 공포감을 더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만일 진짜 전기톱을 영화에 사용했다면 영화가 가진 긴장감이 훨씬 덜했을 것이다.




 이번엔 "체인톱" 및 "기계톱".

 "전기톱"과 "엔진톱"이 구동에너지에 따른 구분이라면, "체인톱"은 작동방법에 대한 용어이다. 체인톱의 구동원리는 구동계가 체인을 빠른 속도로 이송시키면 그 끝에 달린 톱날이 물체를 절단하는 방식이다. 전기톱 엔진톱 모두 체인톱과 기계톱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렇게 체인 끝에 톱날이 달린 방식만 사용하는 것이라면 뭐든 "체인톱" 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 사진처럼 이동이 불가한 대형 체인톱도 존재한다.



 기계톱의 범주는 이것보다 한결 더 넓다.

 사람의 힘이 아닌 구동계를 갖춘 모든 톱질장비가 다 기계톱이라 할 수 있다. 체인톱이 기계톱의 대표적 방식이지만, 일자 칼날을 왕복해서 절단하는 방식의 기계톱(Drag Saw)이나 회전형 칼날의 기계톱(Circular Saw)도 있으므로, 모든 기계톱이 다 체인톱이 될 수는 없다.


다양한 방식의 기계톱


 지금까지 소개한 톱들의 범주 정리. 여기까지 잘 이해하셨으면 오늘작가가 저 영화 제목에 왜 저렇게 불편해하는지 잘 공감하실 수 있을 터.


직접 만든 PPT. 어째 일하고 있는 기분이 갑자기 든다...


 이 영화가 개봉된 1974년에는 배터리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아서 이동식 전기 체인톱을 만들 수 없었다. 이동식 전기 체인톱은 리튬이온배터리가 상업적 생산에 성공하여 대중화가 된 이후인 2000년대 이후에나 보급된 제품이며 배터리 기술이 현저히 좋아진 요즘에도 충전된 에너지 이상 연속사용이 불가하니 연속작업이 요구되는 곳 또는 큰 힘이 요구되는 대형 작업에는 엔진 체인톱이 훨씬 더 선호된다.


 정리하자면, 공포영화의 기념비적인 이 영화 제목은 "텍사스 전기톱 학살"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되었으며, 원제였던 "THE TEXAS CHAINSAW MASSACRE"를 충실히 번역한 "텍사스 사슬톱 학살"이나 차라리 원제 그대로인 "텍사스 체인톱 학살"이 되었어야 했다.


 공학적 관점에서 조금 더 나가면, 제목만으로는 저 체인톱이 이동식인지 고정식인지 전기 구동방식인지 엔진 구동방식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텍사스 이동식 엔진구동 체인톱 학살(THE TEXAS MOBILE ENGINE POWER CHAINSAW MASSACRE)"라고 하는 것이 세계 수많은 엔지니어들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했을 것 같으나, 대중성을 고려해서 그러지 못했을 것 같다고 내심 짐작할 뿐이다.


 이제 텍사스 전기톱... 영화 속편이 나오면 주변에 한 마디씩 해주자. 


 "저거 전기톱 아닌데."


(아, 물론 언젠가 진짜 전기톱을 사용한 속편이 나올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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