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파견살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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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르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몇 되는데,
1. 이 나라는 성인 남성의 태반(체감상 약 90% 이상)이 수염을 기른다. 수염이 없는 성인 남성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인식이 좀 있다(낮은 빈도로, 깔끔하게 면도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2. 수염을 기르고 현지 전통복(샬와르 까미즈)을 입으면 어쩐지 상당히 현지인에 동화된 느낌을 준다. 직원들의 대부분이 현지인들로 이루어진 지사이니 현지인들과 친밀감을 형성하는 수단으로도 수염 기르기는 나쁘지 않다.
3. 나는 파견 지사의 조직장인데,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인이라 현지인보다 많이 어리게 보인다. 수염을 기르면, 체감나이 급상승 + 얼굴에 권위 부여. 이제 조직장 분위기가 좀 난다.
4. 사실 이게 진짜 숨은 목적. 태생이 게으르고 만사가 귀찮은 나는, 아침에 면도하는 게 그렇게 싫었다. 면도하고, 애프터쉐이빙 스킨 톡톡 하고, 로션 또 바르고... 어떤 날은 잘못 면도해서 피가 철철 나면 연고도 발라야 한다. 한국 사회에선 그걸 아침마다 마지못해 했었는데, 어, 여긴 내가 총대빵이네? 어, 면도 안 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이 없네? 현지 지사 한 석 달 출근하다가 어느 날 이걸 깨닫고 그날부로 기르기 시작함.
수염을 기른 지 얼추 2년 가까이 되어간다.
수염을 기른다고 해서 완전 면도를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삐져나오는 수염을 가위질해서 모양을 잡아주고 멋을 내야 이미지가 유지가 된다. 수염에 아예 손을 안 대면 삼국지 관우 수염처럼 무한정 길어진다(물론, 자연 탈모가 되니 수 m씩 자라진 않겠지만...). 특히 콧수염을 제 때 길이정리 안 해주면 밥 먹는 것이 무척 불편해진다. 국이나 수프 먹다 콧수염에 다 묻어버리는 불상사가 생긴다.
나는 태생적으로 콧수염과 턱수염은 빽빽한 편인데 구레나룻은 무척 엉성한 편.
그래서, 콧수염과 딱 입술너비만큼의 턱수염만 기르고 구레나룻은 정리하고 다닌다. 구레나룻을 정리하지 않으면 들판에 난 잡초처럼 보여서 내가 봐도 비즈니스 룩이 아닌 것 같다. 구레나룻 역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가위질 또는 면도칼 면도를 하면 된다.
수염 기르면서 느끼는 장단점.
일단, 단점부터.
와아... 기르기 전엔 몰랐는데, 수염, 머리카락만큼 빠진다. (물론 빠진 만큼 다시 자란다.)
앞섶에 떨어져 묻은 수염이 없는지 수시로 살펴야 하며, 특히 밥 먹을 때 빠진 수염을 먹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국이나 수프를 떠먹다가 퐁 빠져버린 내 수염을 보면 별로 기분이 안 좋다.... 베갯잇이나 침구에도 적지 않은 숫자의 수염이 발견되니까 테이프클리너로 잘 치우고 잔다.
양념이 많은 음식을 먹을 때면 당연히 수염에 묻는다. 뭘 먹을 때는 확실히 깔끔히 면도한 편이 안 걸리적거리긴 한다.
뭐 그런데, 이건 털 있는 곳의 숙명이니 당연한 거지. 머리카락 안 빠지는 사람 있나. 머리칼 빠지는 게 싫다고 빡빡 밀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지만) 수염 기르는 사람에게 그리 치명적인 단점은 아닌 것 같다.
장점.
그거 말고 전부 다.
수십 년을 면도하며 다닌 사람으로서 하는 말인데, 정말 편하다. 아침마다 꼼꼼히 면도할 일 없고 얼굴에 피 볼일 없다. 피부 보호층을 칼로 밀 일이 없으니 피부도 덜 상하고, 화장품 쓰는 양도 확 줄었다. 칼면도를 안 하니까 당연히 애프터쉐이빙 스킨도 안 쓰고 면도칼 안 사도 되고 불필요한 지출도 많이 줄었다.
여기에 현지인 친밀감 부여, 조직장으로서의 무게감 부여 등의 부가적 장점 추가. (단, 원래 멸치남이라서 남성미가 추가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인. 그중 자유로운 영혼이 아닌 회사원 신분으로 수염을 기르는 것에 대한 주변 반응.
한국 본사에서도 내가 수염을 기르는 것을 알고 있다. 비록 한국사회가 수염 기르는 것에 관대하지 않은 문화를 가진 곳이긴 하지만 본사는 내가 수염을 기르든 말든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국땅 지사를 관리하는 관리자며 문제 안 일으키고 일만 잘하면 되니까. 아직까진 어느 누구도 내게 수염을 깎아라 말아라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간간이 본사에 들르면 몇몇 직원들은 경악하기도...)
정작 내 수염이 환영받지 못하는 곳은 집안.
어머니는 갑자기 분위기 변한 아들 얼굴이 무척 못마땅하신 듯 하지만 그런다고 고집 꺾을 아들이 아닌 줄도 아신다. 울 마누라님도 남편이 수염 기르는 걸 무척이나 불편해하시는 분. 한국에 가끔 휴가차 들어가면 꼭 "마스크를 쓰고" 외출할 것을 당부하며 같이 걸어가는 것도 꺼린다. 자기만의 세계가 이미 확고한 아들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별 관심이 없어 보이긴 하지만 막내딸 역시 아빠가 수염 기르는 게 영 어색하고 신경이 쓰인단다.
올해는 파견 마지막 연차니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말이면 한국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의 고민과 걱정이 시작된다.
그리운 나의 고국 한국에 가는 건 좋지만... 이 수염 이거 어째야 쓰까이...
나는 지금의 내 모습에 매우 익숙하며 딱히 면도하고 싶지가 않단 말이다.
창조주가 필요해서 수염이 나도록 설계해 두었을 텐데, 자라는 족족 다 깎아버리면 자연의 섭리에도 위배되는 일 아닌가. 어디 그뿐이랴. 면도날이 날마다 날마다 피부에 미세한 상처를 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처가 덧나는 걸 방지하기 위한 불필요한 소독용 스킨은 또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 면도날, 면도크림, 스킨, 로션 등을 생산하고 이송하고 소비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지구자원이 낭비되며 하수구로 흘러들어 간 면도된 수염은 또 얼마나 환경오염을 일으킬까. 아무리 생각해도 날마다 면도하는 문화가 자연과 지구건강에 하나도 이로울 게 없다.
외국에 나와보면 수염 문화에 무척 관대하다. 유럽 미국에도 깔끔하게 면도하고 다니는 비즈니스맨의 비율이 더 높아 보이긴 하지만 수염을 기르는 부류도 여전히 많고, 수염을 기른다고 별종 취급받는 경우는 없다. 중동이나 남아시아로 오면 수염을 기르는 부류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가까운 일본만 해도 수염을 기르는 청장년층이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비율로 많다. 수염에 유독 매정한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과 중국 정도가 전부인 것 같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모든 성인남성들이 수염을 기르는 게 당연한 한국땅이었는데, 어쩌다 수염의 불모지로 변해버렸나. 아마도 짐작컨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의무병제도가 도입이 되면서 모든 군대에서 면도를 당연한 병영문화로 끌고 가면서 사회 전체가 수염 기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로 바뀌지 않았나 추정해 본다. 언어도 하나 피부색도 하나 인종도 하나인 한국인. 사회의 표준이 생기면 "남들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유달리 소속감을 강조하는 한국 특유의 문화 때문에 죄 없는 수염만 그렇게 된 게 아닐까.
분석과 감상은 이럴지언정, 나도 한국에 복귀하면 다시 면도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멀쩡한 회사의 관리직으로 근무하면서 자유인의 상징이 되어버린 수염을 유지하기란 보통의 용기로는 어렵지 싶다. 만나는 사람마다 "수염은 왜 길러요?" 할 건데, 내가 매번 "그쪽은 왜 수염을 안 길러요? 반사-"할 자신이 별로 없어서이다. ㅠㅠ
한국 사회도 관용의 턱이 낮아지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한 사람이 그러면 유별나 보이지만 서너 사람이 거들면 익숙해지기 시작하고, 여러 사람이 거들면 그때무터 문화가 될 텐데, 한국에서 저랑 같이 수염 길러보실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