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글 쓰는 장비를 많이 가리는 편이에요. 손에서 생각이 촤라락 뿌려지는 느낌이 좋아서 꼭 풀사이즈 세벌식 키보드만 사용해서 글을 씁니다. 예전엔 기계식 키보드를 애용해서 하이힐 또각또각 소리마냥 경쾌한 타자소리도 즐기곤 했지만 요즘엔 도로 조용하고 값싼 멤브렌인 키보드로 돌아갔습니다. 기계식 키보드는 많이 무겁거든요.
스마트폰으로 글을 쓰면 독수리 타자밖에 되지 않아 생각의 속도를 타자가 못 쫓아와서 무척이나 갑갑할뿐더러 눈도 침침 목도 뻐근해져서 어지간하면 스마트폰 글쓰기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만 예외가 있죠. 오늘 같은 날이요.
잠시 해외에 나갔다 오려고 공항에 왔습니다.
어딜 가냐구요? 한국이요 ㅋㅋㅋ.
거진 8개월 만에 가는 집입니다. 간간이 사진으로 만나는 애들이 엄청 커 있을 것 같군요.
엠폭스로 공항이 시끄럽다던 뉴스를 봤는데 오늘은 무척 평온해 보입니다. 잠깐 시끄럽다가 잠잠해져야 할 터인데요. 아무리 조심해도 한 번 퍼지게 되면 결국 거의 다 걸려버린 코로나처럼 되면 곤란할 텐데 부디 초기에 잡히길 기원해 봅니다.
국제항공편은 3시간 전 공항 도착하라고 해서 여유있게 왔는데 오늘따라 공항이 유독 널럴합니다. 수속 후 게이트까지 1시간도 안 걸렸어요. 그렇다고 여긴 구경할만한 면세점이 있는 곳도 아니고 별로 볼 게 없는 심심한 공항이거든요.
그래서 그냥 폰 꺼내놓고 아무말이나 꺼내보고 있습니다. 하하하. "생산적"으로 시간 보내기 글쓰기만 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아참. 한국에 왜 가냐구요?
정기귀국휴가 갑니다. 저는 회사의 해외지사에 근무하는 단신부임 직원인데 단신부임자에겐 파견가족수당을 안 주는 대신 가끔씩 한국엘 보내줍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한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멉니다.
그래도 코로나 이후 타이항공 방콕 경유 편이 열려서 24시간 안에 갈 수 있습니다. 직항은 없어요. 저는 집이 지방이라 인천공항에 내려서도 4시간 반 버스를 더 타고 가야 한답니다. 인천공항에 내리면 "이제 반 왔다"싶어요.
티켓팅을 한 달 전에 해놓고 또 뭔 일 생기면 어떡하나 조마조마했었는데 무탈히 탑승수속 잘 마치고 게이트 앞까지 잘 도착해서 참 다행입니다. 여긴 툭하면 시위에 테러에 당장 내일 일도 몰라서 언제 도로가 차단될지 모르거든요. 다이내믹한 곳이랍니다.
이번에 한국 가면 할 일.
1. 큰아이 입시원서 챙기기
2. 마누라님 모시고 자사고 설명회 가기
3. 부모님 및 친인척 찾아뵙고 인사하기
4. 본사 주무부처 찾아가서 알현드리기
5. 전어회 깻잎에 싸 먹기
6. 장어구이 먹기
7. 화장실 환풍기 고치기
8. 출국용 기초 식재료 사서 공수하기(고춧가루, 김, 각종 장류, 건어물 등)
9. 기네스 맥주 마시기
10. 친구들 만나기
11. 기타 등등 소소하게 많아요.
(번호는 우선순위 아니고 대충 생각나는 대로...)
오가는 날 주말휴일 제외하고 8일간 꿀휴가입니다만, 모처럼 왔으니 본사에도 가야 하고 명색이 조직장 신분이라 책임조직 주요 의사결정도 완전 손 놓을 순 없는 숙명의 직장인입니다. 일 다 내려놓고 쉬다 오라 덕담하지만 돌아가면 도로 다 제 일이라 그게 그렇게 잘 안 되거든요. ㅠㅠ
저는 의식적으로 이륙 전에 제가 타고 갈 비행기를 사진 찍어 남기는데, 오늘은 연결탑승구에 비행기가 보이질 않네요. 제가 너무 일찍 왔나 봐요.
글 쓰는 와중에 웅~하는 차소리가 나서 빼꼼 다시 내다보니 드디어 왔습니다! 타고 갈 비행기 왔으니 이제 글도 살살 마무리하고 짐 챙겨서 탑승준비 해야겠어요.
가는 동안 술은 와인 마실지 맥주 마실지 뭘로 마실지 고민해 봐야겠어요. 딱 한잔만 먹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