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 쓰려면 장비빨을 엄청 챙기는 스타일.
정작 글을 잘 쓰지도 못하면서도 찬찬히 사유하며 설계하기는 귀찮고, 그냥 되는대로 머릿속에서 생각난 단어들을 생각하는 속도만큼 촤라락 화면에 깔아버리는 걸 선호하는 "일필휘지" 스타일이라서 "풀 사이즈 키보드"와 "세벌식 자판", 성능좋은 "마우스"를 갖춰 놓고 글을 써야 글 쓰는 맛이 난다. 좁은 자판의 랩탑 PC 내장 키보드와 터치패드로는 영 그 맛이 안 나서, 어지간하면 랩탑 내장 자판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늘은 퇴근하고 뭘 좀 해보려는데...
유선 마우스 왼쪽 버튼이 영 이상하다.
한 번 클릭했는데 자꾸 더블클릭이 되거나, 클릭을 했는데 클릭이 안 먹는다.
좌 버튼 클릭 시 성공 확률은 랜덤입니다. 안 된다고 안 했어요.
내가 스타나 롤을 엄청 많이 하는 덕후도 아닌데, 이거 왜 맛이 갔을까. 살살 달래 쓰려고 검지 손가락으로 마우스 왼 버튼을 악다구니를 써 가며 클릭을 몇 번 더 하다가 마우스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내 힘의 강도와는 무관하게, 클릭이 되다 말다 아주 그냥 랜덤이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좋아. 선수교체.
서랍 어딘가 굴러댕기던 무선 마우스를 꺼냈다.
무선 마우스가 선이 안 거슬리고 편한 건 알지만, 주기적으로 배터리를 교체하는 것이 더 귀찮기도 하거니와 나는 친환경주의자라 쓰레기 만들기 싫어서 유선 마우스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서 그간 안 쓴 것뿐인데, 유선 마우스가 맛이 간 관계로 지금 별 대안이 없다.
스크롤 버튼 굴릴 시 먹힐 확률은 랜덤입니다. 안 된다고 안 했어요.
마우스 동글을 USB에 꽂고, 요 녀석을 사용하려는데...
이번엔 스크롤 버튼이 너무 헐겁다. 한 클릭 내리면 어떤 땐 스크롤이 먹고 어떤 땐 안 먹고 아주 그냥 또 랜덤이다. 이미 슬슬 열받았는데, 다시 또 화딱지가 나서 못 쓰겠다. 이것들이 아주 그냥 단체로 파업일세. 아니지. 때때로 되긴 되니까 파업은 아니고 아주아주 불성실 태업이겠네.
늬들 그러면 다 해고야.
이제 용병을 구하러 가야겠다.
나는 태생적 히키코모리라 방문 밖에도 나가기 귀찮지만, 말 안 듣는 마우스를 을르고 달래 쓰려다 울화통 터져서 안 되겠다. 이 시간에 마우스 구할 만한 곳이 어딨을까나. 궁하면 있지있지. 가까운 당직실로 간다. 당직실 PC에 연결된 마우스, 임시로 제가 좀 빌려 쓰겠어요. 그럼 당직실 PC는 어떡하고? 돈 워리. 당직실 PC는 거의 정보수신용 PC라서 조금 고장난 마우스 써도 크게 안 불편하다. 그리고 밤 새 그거 쓸 사람도 없으니 차차 갈아치우면 되니 노 워리 플리즈. 그리고 태반의 당직자도 어차피 나란 말이다. ㅠㅠ
세 번째 마우스는 이제 좀 쓸만하다.
두 번째 헐거운 스크롤 휠 마우스 쓰다가 얘 쓰니까 휠이 그냥 아주 쫀쫀한 게 손에 착착 붙는다.
좌 버튼 클릭도 딱 적당한 힘에 딱 적당히 "딸깍" 거린다.
분부만 내려 주십쇼. 딱 그대로 실행하겠습니다.
정말 별 거 아닌데, 조금의 차이가 신경을 많이 건드리네.
내가 뭐 할려고 마우스를 찾으러 다녔던지 까먹었지만, 까먹은 김에 마우스 교체한 얘기나 쓰고 자야겠다.
덧붙이는 글.
어느 작가가 호숫가에서 글을 쓰다가 마우스를 호수에 빠뜨렸다.
갑자기 홀연히 산신령이 나타나 묻는다.
"이 금마우스가 네 마우스 이더냐?"
"아닙니다 신령님, 그것은 제 마우스가 아닙니다."
"그럼, 이 은마우스가 네 마우스 이더냐?"
"아닙니다 신령님, 그것도 제 마우스가 아닙니다."
"그럼 네 마우스는 어떤 마우스냐?"
"제 마우스는... 잘 클릭해도 지 멋대로 클릭이 되다 말다 어떤 땐 한번만 클릭하도 더블클릭이 되곤 하는 미친 마우스입니다."
"이런 정직한 사람을 봤나. 감동이로다. 내, 너에게 금마우스 은마우스와 네가 쓰던 원래 마우스 모두를 선물로 주겠다."
"신령님. 클릭도 안 되는 금속모형 다 필요없고 그냥 버튼 클릭 잘 되는 마우스 하나만 빌려주던가 팔던가 하세요. 화딱지나서 글을 못 쓰겠어요."
...그랬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