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내 인생 마지막 배낭여행일지도...
저는 모태 집돌이입니다.
집 밖에 나가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옴삭하고 따끈한 이불 안이 제일 좋습니다.
그런데 성격이나 취향과는 무관하게 제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지 뭐예요.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졸업하면서부터 어디 한 곳에 진득하게 오래 살았던 기억이 별로 없네요.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산 것도 모자라 해외 파견근무라니. 평소 제 성향을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저개발국가 파견자 신분으로 살고 있는데, 테러 위험국가 - 외출의 자유가 없는 근무환경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위로와 보상 개념으로 회사에선 오지근무 파견자에게 1년에 한 번 전지휴가를 부여하는 특혜를 줍니다. 여행을 안 좋아하는 집돌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공짜 휴가를 반납하기엔 너무 아깝죠. 공짜라면 신라면 국물도 마신다는 한국인=저. 가야죠.
이번 전지휴가는 런던/파리로 잡았습니다.
한국에서 가기엔 너무나 멀고 비싼 도시라 엄두가 안 나서 한 번도 가 볼 생각을 안 했었는데 이곳 파키스탄에선 그나마 가깝기도 하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가 보겠냐는 마음이 들어서 큰 맘먹고 질렀어요.
자. 이제 떠날 도시 골랐습니다.
아. 막막합니다. 뭐부터 해야 하나.
공부부터 해야죠.
저는 여행지 계획 세울 때 아래 사이트를 많이 참고했어요.
1. 주요 여행사의 대표 여행상품을 벤치마크 했어요.
- 아무래도 이 분야 전문가는 여행사죠. 여행사가 추천하는 필수 코스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2. 네이버 여행
- 여행에 필요한 필수 정보가 일목요연 잘 정리되어 있어요.
3. 여행 블로그
- 역시 직접 가 본 사람들 얘기가 찐 정보죠. 블로그 검색도 많이 했구요. "체크인유럽"이나 "유랑"같은 대표적인 여행자 모임 카페에서도 수준 높은 정보들을 긁어모았습니다.
4. 마이리얼트립/클룩 등
- 현지 투어상품 검색할 때 참고했어요.
5. 구글지도
- 현지 대중교통편과 동선도 확인하고, 숙박/식당 평점도 확인하고. 구글지도 없었을 때 여행 어떻게 다녔나 몰라요.
6. 부킹닷컴/에어비앤비/아고다 등
- 숙박업소 검색하고 예약할 때 참고한 사이트들입니다.
누가 스케줄을 짜 주면 참 좋겠다 싶다가도 남이 짜 놓은 스케줄을 보면 이건 이래서 맘에 안 들고 저건 비싸고 이건 너무 쇼핑 중심이고 저건 식도락 중심이고 요건 박물관이 없고 제 취향과 딱 맞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자유 여행의 묘미가 뭔가요. 내 맘에 딱 맞는 일정이 가능한 게 가장 큰 장점인 거죠.
어쨌든 큰 틀 짜는 데는 그리 오래 안 걸렸는데, 디테일하게 안배하려니 품이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1. 관광지마다 운영날짜/시간을 먼저 확인했어야 했어요.
- 11월이 되니 주요 관광지가 엄청 늦게 문을 열고 해지기 전에 무진장 일찍 문 닫더라고요.
2. 동선을 최소화해야 했어요.
- 관광지 위치와 대중교통 수단을 일일이 확인하고 동선을 체크했죠.
3. 경비도 최소화해야 했어요.
- 비싼 관광지 입장권은 기간권 패키지(런던 패스, 파리 뮤지엄 패스)로 구매하고 와라락 몰아보는 걸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겁나 뛰어야겠군......
4. 숙박을 잡아야죠. 싸고 좋은 곳은 없습니다.
- 저는 주요 도심과 거리는 조금 멀더라도, 역세권과 가까우면서도 저렴한 곳을 골라골라 잡았습니다. 전망 좋고 도심지에 가까울수록 좋겠지만, 그건 금수저로 태어나면 다음 생애에.
- 원래 저는 저렴한 호스텔 도미토리를 선호하지만(잠만 자면 된다 주의) 이번 여행은 두 살 터울 친누나가 따라온대서 런던에선 원룸 스튜디오, 파리에선 1성급 호텔로 잡았습니다. 도미토리보다 좀 더 비싸긴 했지만 역시 비싼 만큼 개인 프라이버시가 보장되고 독립된 욕실이 있어 좋았습니다. 저도 5성급 도심지 호텔이 제일 좋은 거 안다고요... 돈이 없어서 그렇지........
털털하고 안 까탈스러운 친누나는 여행 일정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율하거나 싸울 일도 없었죠. 너무 빡빡하고 많이 걸었던 거 빼고 나면 저는 나름대로 알찬 여행이었다고 만족했는데 친누야는 어땠나 몰라요... 암튼 자유 해외여행 처음 따라온 누이는 공부는 많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한 열흘 갈아 넣어 만들어진 최종 계획표. 두둥!
지금 봐도 겁나 빡셉니다.
저걸 다 했느냐?
아뇨. 좀 덜 중요한 일부 관광지는 날씨가 안 좋아서, 너무 피곤해서 포기한 곳도 있긴 해요.
그래도 어지간한 곳은 악착같이 돌아다니며 대부분 다 찍고 왔답니다.
다 짜놓고, 실행까지 해 놓고 온 마당에 해당 계획표에 대해 자체평가를 좀 하자면...
1. 플랜 B 같은 거 없었다. 무조건 직진.
- 지나서 하는 말이지만, 체력 감안해서 옵션 A, 옵션 B 해서 너무 힘들 땐 좀 쉬어갔어도 괜찮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날씨별 옵션도 없었어요. 비 오면 비 맞고 간다는 맘으로! 근데 막상 가 보니, 그게 좀 아니더라구요. 날씨가 중요한 곳 갈 때는 날씨 옵션도 포함하시면 좋겠습니다. "맑을 때 계획/비 올 때 계획" 나눠서 말이죠.
2. 런던 3뮤는 좀 심했어... 1일 1뮤 안 한 게 어디야...
- 런던 배정 5일 중 3일을 뮤지컬 공연 관람을 넣었더랩니다. 유명한 뮤지컬이 한국보다 싸더라구요. 문제는...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종일 극도로 피곤했으니 뮤지컬 보러 가서 잘 잤습니다. ㅠㅠ 5뮤 넣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요. 공연 관람도 체력 감안해서 하셔야 해요.
3. 쉬는 시간 / 밥 먹는 시간도 중요하다!
- 여행은 체력인데요. 이게 아침 체력 있다고 밤까지 계속 가는 게 아닙니다. 중간에 쉬어주고 당 보충 해줘야 가능한 거예요. 여행계획을 밥 먹을 새도 없이 너무 빡빡하게 짰더니 힘들었습니다... 하루 일정 마치고 숙소 도착해서 아이고 다리야 어깨야 곡소리만 났어요.
4. 비수기라 다행이야.
- 여행준비는 성수기는 석 달 전, 비수기는 늦어도 한 달 전까진 마쳐야.
- 스케줄을 다 짜놓고 예약을 하려니. 헉. 이미 매진/마감이 속출! ㅠㅠ(이때가 대충 보름 전). 어쩔 수 없이 가능한 예약 타이밍에 맞추어 또또 스케줄을 고치고 앉아 있었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보름 전에 짜려니 이 사달이 나는 게 당연하죠. 그래도 비수기라 어찌저찌 빈 타이밍 찾아 적절히 빡빡하게 짤 수 있었어요.
- 유로스타 역시 하루라도 먼저 예매해야 더 싸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버렸지 뭐예요. 그래도 완전 비싼 가격에는 안 산 걸 위안 삼고 있습니다.
기타 세부적인 감상 평가는 본문에서 다시 꺼내도록 할게요.
짐을 쌉니다 이제.
이번 여행도 배낭여행입니다.
공항 리무진/택시 같은 건 옵션에 없습니다. 대중교통만 이용해서 이동할 거니까 짐이 거추장스러우면 곤란합니다. 여행 교본대로, 모든 짐을 싼 다음 다시 다 꺼내서 절반으로 줄였습니다.
속옷 양말 몇 벌, 갈아입을 상의 한 벌, 보온조끼 한 벌, 세면도구 및 로션, 자물쇠, 약간의 현금(파운드 & 유로), 비상용 세컨드 보조 폰, 보조배터리 및 케이블, 충전기, 멀티플러그, 손톱깎이, 접이식 우산, 에코백, 여권 및 사본, 증명사진, 모자, 크로스백, EVA 폼 슬리퍼, 여행계획표 및 종이바우처, 세탁세제 아주 약간, 스마트폰 분실방지 스트랩, 그리고 유럽 eSIM.
이미 유럽에서 소매치기 당해본 경험자라 지갑은 아예 들고 가질 않았습니다. 암만 뒤져봐라 지갑 나오나 ㅋㅋㅋ. 폰은 안 들고 갈 수가 없으니 이번엔 미리 분실방지줄 구매해서 준비해 놨었어요. 거추장스럽고 보기 너저분하지만 그게 대수랴.
배낭 하나를 따로 재 보니 5.5kg 나오는군요. 이만하면 단출합니다.
준비 다 한 거 맞나요?
몰라요 저도. 여권 스마트폰 신용카드만 있으면 없는 거 현지 가서 사죠 뭐.
일단 대충 다 했고.
다음 편부터는 런던행 고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