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2_ 지금의 나를 만든 사람들
인생에 은인들이 참 많다. 뭐 아무래도 단연 절대적인 넘버 원은 부모님인 건 명백하지만. 큰아빠부터 시작해서 고2 담임샘, 영혼의 엄마아빠가 돼주셨던 CCC 간사님들, 운 좋게도 존경스러운 지도교수님과 교무실 내 교사들의 선생님이 되어주시는 분들까지 만나게 되었다. 지금의 내가 있게 해 주신 분들. 분에 넘치는 내리사랑을 내게 부어주신 분들. 지금까지 만난 제자들이나 타인들에게 내가 준 사랑이나 베푼 조그마한 친절이라도 있다면 그건 다 그분들 덕이다.
이사를 가고 물건들을 대폭 정리하는 대청소를 할 때에도 유독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20년의 세월 동안 녹슬지 않는 나비귀걸이. 막상 잘 착용하지는 않는데 기어코 여태 자신의 입지를 지켜내었다.
보라색 나비 밑에 색색깔의 작은 구슬들이 영롱하게 달려 있는 귀걸이는 HJ쌤께 받은 거다. 난생처음 귀를 뚫은 10살 생일에. 우리 부모님께서 하시는 학원에서 수학선생님으로 일하셨던 HJ샘은 언제부터인지 기억할 수 없는 때부터 항상 내 곁에 계셨다. 학원 딸래미에게 학원은 집이자 놀이터이기도 하니까.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내 생일 때마다 매번 내 마음을 가장 부풀게 하는 선물을 주시곤 했다. 내 용돈으로는 감히 넘볼 수 없었던 100가지 색깔 볼펜 세트라던가, 아바타를 꾸밀 수 있는 맨 위층을 가진 삼단 필통이라던가.
HJ샘은 객관적으로도 예쁘셨지만 내게는 누구보다도 예쁜 어른이었다. 수학도 잘하시고, 무엇보다 어린 내 눈높이에 맞춰 마음을 잘 알아주셨다. 한창 외모에 예민할 사춘기 때는 날 이해 못 하는 엄마 몰래 멋 부리는 걸 도와주시고, 코에 난 여드름에 속상해할 때 흉 지지 않도록 직접 깨끗하게 짜주시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한낱 고용주의 딸일 뿐인데, 10살짜리 꼬마에게 얼마나 좋은 소재의 귀걸이를 사주셨길래 그 꼬마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꿈꾸는 나이까지 귀걸이가 녹슬지 않는 걸까.
그 예쁜 마음 씀씀이가 선생님께 받은 가장 큰 것이겠다. 가끔 내가 진흙구덩이에서 구르는 때에도 그런 건 마음 어딘가에 흙 속 진주처럼 빼꼼 숨어있으니까. 다시 찾아내서 묻은 흙먼지들을 툭툭 털어내고 다시 닦아주면 된다. 아 여기 있었지, 여전히 빛나고 있지, 나는 이런 걸 가진 운 좋은 사람이지 하고.
내 기억의 어딘지 모를 시작점부터 중2 때까지 늘 곁에 있었던 HJ샘은 결혼을 하시면서 타지로 가 아이를 낳으셨고, 그 아이가 세 살이 되고 내가 수능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와 함께 세상을 뜨셨다.
세 살이 되도록 아이가 말은커녕 옹알이도 잘 터지지 않았는데, 시댁에서는 병원이나 상담에 있어 보수적인 편이었다고 한다. 원인을 알지 못하니 선생님은 본인 피를 탓하게 되셨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이셨던 아버지 때문일까, 어린 나이부터 다리를 저는 자신 때문일까.
엄마한테 전해 들어 알고 있었는데, 수능 끝나면 꼭 찾아뵈어야지 했는데. 고3을 보내며 신앙을 갖게 되어 내 마음이 편안하니 HJ샘께도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전해주고 싶었는데. 기도하고 있다고 직접 얼굴 보고 말하고 싶었는데.
소중한 사람이 삶에서 없어지면 사람은 자신을 탓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어린 마음에 나도 샘의 허망한 죽음 앞에 나 자신을 원망하게 되던데, 원인도 예후도 알 수 없는 아이의 문제가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했을 샘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황폐했을까.
병원에, 상담에 가보셨으면 좋을 텐데. 시댁 참 너무하다 등의 야속한 마음들은 꽃집에서 선생님을 위한 국화꽃다발과 아이를 위한 세 송이의 국화꽃다발을 사는 데서 끝이 났다. 세 송이의 새하얀 국화.. 그 앞에서 엄마도 나도 뭐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감사하게 샘의 죽음을 상처가 아니라 별자리로 내 마음에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서로 사랑했던 만큼 나의 샘에 대한 기억이 시린 게 아니라 아름답길 바라셨을 테니까.
HJ샘, 그리고 내 인생의 스승들 덕분에 나는 한 뼘이라도 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내 마음이 사막처럼 뻐쩍뻐적 마를 때에도 그분들로부터 받은 보석들은 눈치채지 못한 사이 내 마음을 다시금 적셔준다. 정말 말라비틀어질 때 만난 몇 방울의 물방울이 ‘아, 그래도 살 수 있겠다’ 싶은 시원함을 주기에 충분하니까.
나비 귀걸이는 내가 내 인생의 스승들로부터 받은 내리사랑을 떠올리게 해주는 집약체와 같다. 앞으로도 내 보석함 한 켠의 입지는 굳건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