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2_ 내 마음속 가장 선명한 별자리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면 어떻게 하셨을까? WWJD로 젊은 크리스천들이 줄여 쓰기도 하는 크리스천 사이 유명한 문구가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저 생각을 자주 해야 하겠지만, 사실 나에게는 더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떠오르는 생각.
What would my 큰아빠 do? Uncle이라는 말로는 대체가 안 된다. 우리 큰아빠는 내게 말 그대로 큰 아빠니까.
어릴 적 나의 친할머니댁 방문 기억은 소망공동체에서 시작하거나, 소망공동체에서 끝이 난다. 남들이 안 믿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게 지명 자체가 ‘왕촌’인 공주 주변 시골마을을 굽이굽이 들어가면 할머니집과 왕촌교회, 그 옆에 소망공동체가 있었다.
소망공동체는 우리 큰아빠가 20살 때 행글라이더를 타다 떨어져 전신마비가 되신 후 3년째 되던 해 세우신 장애인복지시설이다. 첫 1-2년은 중학생이던 우리 아빠한테 수면제를 사다 달라고 할 정도의 시기였다고 한다. 아빠 말로는 집 분위기가 생지옥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점집이든 한의원이든 가리지 않고 이곳저곳을 다니던 할머니와 큰아빠가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 마음의 희망을 되찾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시작하셨다고 했다.
일층에 위치한 큰아빠 방에 가면 물침대 위에 길고 마른 나의 큰 아빠가 누워계셨다. 대체로 침대 위에 천으로 된 손걸이에 뼈대가 분명히 보이는 손을 얹은 채로, 항상 허허 웃음으로 우리를 반기며. 물침대에 앉아 언제 앉아도 신기한 그 감촉에 엉덩이를 구르기도 하고 손걸이에 매달리려 시도도 해보다 보면 어느새 어른들의 대화시간이 시작됐고 나와 사촌들은 소망공동체 2층으로 올라갔다. 20년쯤 전에 소망공동체가 다른 건물로 이사했기 때문에 영영 어떤 용도였을지 정확히는 모르겠는 방 하나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장난감이 가득했다.
그 방으로 가려면 거쳐야 하는 길에는 늘 계단 대신 경사로. 1층 거실 어딘가에 항상 누워있었던 사지마비 예은이. 사촌들과 다양한 장난감을 갖고 놀다 보면 어느새 섞여 놀던 공동체 식구들. 나보다 한 살 많은 지적장애 현명이 오빠나 그 시절 막내 예은이를 거의 양아들, 양딸처럼 돌보셔서 나는 꽤 나이가 먹을 때까지 그 둘이 피로 섞인 내 사촌인 줄 알았다.
아무려면 어떠랴 사실 진짜로 모두 나의 사촌들이었다. 나이를 차차 먹으면서야 알게 된 건 공동체 식구들 대부분이 중증장애에 오 갈 곳이 없거나 가족들이 집에서 케어해 줄 수 없는 경우였다. 그런데도 나보다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도 사랑과 웃음이 많았다. 오죽하면 처음으로 학교에서 단체로 다른 복지시설에 봉사를 갔던 중2. 회색과 뭔가 끈적함으로 기억되는 음울했던 시설분위기에 혼자 아주 깜짝 놀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소망공동체는 내게 노랑빛과 하늘빛의 느낌, 햇살과 비눗방울, 타조가 알을 낳는 광경을 처음으로 본 곳, 언제 가도 사랑과 웃음으로 날 반겨주는 사촌들이 가득한 곳이었으니까.
한 번은 현명이 오빠랑 깊게 파인 도랑에서 둘이서 멀리 침 뱉기 놀이를 하다가 욕심이 과했던 내가 떨어져 버려서 현명이 오빠가 어른들을 불러와 구해준 적도 있었다. 팔다리 여기저기 까졌지만 나 스스로도 떨어진 경위가 너무 웃기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어른들을 불러온 오빠가 너무 고마웠다. 누가 지었나 이름 한번 참 잘 지었다. 진또배기로 현명이 오빠다.
현명이 오빠는 내가 지금 공동체에 가도 늘 웃으며 내가 집에 올 때까지 곁에서 맴돌아준다. 밥은 먹었는지 묻고 간식을 챙겨주고, 요즘 오빠가 수확한 고구마와 양파 상태와 더불어 내가 놓치고 있는 공동체 소식들을 전해준다. 역시 여전히 현명이 오빠다.
큰아빠와 나눴던 대화들도 내게 큰 자양분임에 확실하나, 큰아빠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실체로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것은 역시 소망공동체 그 자체다. 할머니와 큰아빠의 끊임없는 피땀눈물과 기도. 도우신 많은 손길들. 소망 위에 더해지는 은혜와 사랑. 가장 약한 데서 가장 밝게 퍼지는 한결같은 그 빛.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내 마음이 주저앉아있을 때 큰아빠는 나를 소망공동체로 불러 1달간 입주봉사를 시키셨다. 말이 봉사지 주러 가서 잔뜩 받고 왔다. 가장 단순하고 낮은 삶에 아이러니하게 가득 차있는 감사와 행복.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서로 나누는 것.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두되 도울 수 있는 건 서로 기꺼이 돕는 것. 서로의 자립을 돕되 함께 웃으며 공생하는 것. 그렇게 큰아빠와 나의 사촌들은 몸은 다 커버린 나를 또 한 번 먹이고 입히고 일으켰다.
내가 미국행을 준비하던 한 학기 내내 큰아빠가 아프셨다. 말 그대로 사경을 헤매셨다. 남들에게 감기면 큰아빠에게는 폐렴, 그래 뭐 알아왔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큰아빠처럼 사는 사람이 이렇게 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계속 당해야 하는 걸까? 이해가 가지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도 중엔 원망이 반 이상이었다.
결국 내가 미국에 있을 때 큰아빠는 돌아가셨고 나의 부모님은 상이 끝나고 나서야 내게 알려주셨다. 나를 배려하신다고 그러신 게 제일 큰 이유였을 테다.
미국 가서도 큰아빠 기도를 매일 하던 나는 당연히 많이 울고 슬펐지만, 다행히도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다. 이 땅에서 하실 일을 다 하셨으니 가신 거고, 이제는 고통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우실 거니까, 먼 훗날 즐겁게 다시 만날 거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전히 큰아빠는 나와 함께다. 큰아빠라면 이때 뭐라고 말해주셨을까, 큰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번 가을에는 소망공동체 고구마축제에 꼭 양손 무겁게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