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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이 정말 너무 맞는 말이라 생각했다. 특히 한창 예민할 사춘기 때는 고모들, 이모들이 걱정한답시고 나에 대해 요모조모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게 너무 싫었다. 20대에는 왜 막내인 우리 아빠에게만 가족의 짐이 크게 느껴져야 하냐며 다른 친척들이 원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제서야 어렴풋이 하는 생각은 가까운 이웃이 나을 때도 분명 있지만, 혈육은 또 분명 혈육이구나 하는 것이다. 첫째 큰아빠와 할머니의 장례, 사촌들과 나의 결혼, 할아버지의 기일, 새로운 생명의 탄생 등 경조사를 성인이 된 이후 겪으며 더 그런 것 같다. 연락이 뜸하고 한동안 얼굴을 못 봐도 결국은 뗄래야 뗄 수는 없는 사이. 오랜만에 소식을 들으면 그래도 안녕을 애틋하게 바라게 되는 사이.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면 감나무와 소고깃국 등과 함께 뭔가 어렴풋이 이미지로, 냄새로 때로는 손길과 품으로 어딘가 분명히 존재하는 사이.
어제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받자마자 큰고모 목소리인 걸 알아챘다. 갑상선암에 유방암까지 수술을 연달아 받으셔서인지 힘이 유독 빠져 보여 마음이 아팠지만 임신을 축하한다는 덕담에는 웃음이 분명 깃들어있었다. 같은 지역에 살면서 연락도 따로 안 하는 조카의 좋은 소식이 고모의 삭막한 요즘 일상에 기쁨을 준다는 사실이 새삼 너무 놀랍고 감사하고 죄송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집구석구석에 소소한 장식들을 하며 비로소 꺼내게 되는 것들이 있다. 조건 없는 축복과 사랑이 담겨있는 이모의 뜨개작품들. 코스터는 30개가 넘고 냄비받침도 10개가량에 큰 깔개도 10개는 되는 것 같다. 십자가에 하트에 각종 오너먼트까지 큰 박스 하나 가득이다. 그런데도 평소에는 오염될까 봐 쉽게 꺼내 쓰기가 힘들다. 이모는 또 떠줄 테니 막 쓰라고 하시지만 내 결혼을 앞두고 몇 달을 우리 부부가 행복하기를 기도하며 뜨셨다는 그 소중한 것들을 감히 함부로 쓰기가 어렵다.
어린 내 눈에 항상 세련되고 자유로워 보였던 우리 막내이모. 한국에 유행하기도 전에 해리포터 1권을 내게 건네주고, 겨울이면 눈이 휘둥그레졌던 크리스마스 과자집에, 만날 때마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예쁜 걸 선물해 줬던 우리 막내이모. 이모의 삶에 부는 다양한 바람으로 때론 이태원을, 프랑스를, 지금은 여수를 유랑하시며 나와 꾸준히 항상 함께 할 수 없었지만. 이모의 인생 이야기를 내가 다 모르고 이모 또한 나에 대해 그렇겠지만. 결혼을 앞두고 그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았을 때 그 몇 달간의 헤아릴 수 없는 정성에 눈물을 펑펑 쏟았었다. 감사 전화를 드렸을 때 이모는 뜨개질하는 내내 행복했다고 내게 말해주셨다.
나 또한 내가 받은 건 별로 없어도 항상 아낌없이 계산 없이 퍼주는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까. 괘씸하게도 나의 안부를 자주 궁금해하지도 않는 상대의 기쁜 소식이 들릴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전활 걸어 축하해 줄 수 있을까. 몇 달을 기도하는, 축복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한 정성 어린 선물을 준비할 수 있을까. 나 또한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우선 내년에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출산용품을 기쁜 마음으로 떠보자. 이모의 뜨개 작품들이 내게 출산용품 뜨개 클래스를 신청하게 했듯, 지금까지 내 안에 누적된 받아온 사랑들이 또 다른 모양으로 누군가에게 전해질지 또 모르는 일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