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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라희 Dec 08. 2022

연극 <세인트 조앤> 신념을 가진 자를 세상이 대하는

신념을 가진 자를 세상이 대하는 방식

신념을 가진 자를 세상이 대하는 방식

연극 <세인트 조앤>


지키려는 자와 부수려는 자

연극 <세인트 조앤> © 국립극단

날 세운 종교재판, 조앤의 발목에 걸린 쇠사슬을 풀어주고 양측에 둘러선 대주교와 사제, 종교재판관들은 압박과 회유를 거듭한다. 조앤은 천사의 계시를 따라 전쟁에 나선 것이라 항변하지만 그들의 자의적인 해석과 궤변에 의해 점차 이단 행위로 내몰린다. 한때 용맹한 전쟁 영웅이었지만 사실 글조차 읽고 쓸 줄 모르는 조앤은 그들의 말에 휘둘려 진술서에 싸인을 한다. 목숨을 살려주되, 평생을 어둡고 습한 감옥 안에서 지내야 한다는 판결에 조앤은 결국 화형을 택한다.

연극 <세인트 조앤 Saint Joan>은 평범한 시골 소녀 ‘조앤’이 프랑스의 전쟁 영웅 ‘잔 다르크’로 거듭나는 과정을 둘러싼 전후의 이야기를 다룬다. 조앤이 투철한 신념 하나로 전쟁에 나서고 승리하나, 타인의 필요에 의해 쓰이고 버려지는 과정이 담긴다. 특히 종교 재판으로 화형을 당한 25년 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상상에 기반해 우스꽝스럽게 풀어지지만 알싸한 뒷맛을 남긴다. 

무대는 단출하다. 원형 회전무대를 활용해 기울기만으로 공간을 구분하고 힘의 배분을 나누었다. 원형 무대는 높낮이에 따라 시민과 기득권의 공간으로 나뉘고, 기울기에 따라 바닥으로 내몰리는 인물의 위치와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또한 가로와 세로의 가느다란 빛으로 교차하는 선은 교회를 상징하는 십자가로 배치되기도 하고,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듯 시민과 기득권의 계층을 극명하게 가로지르기도 한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희곡 <세인트 조앤 Saint Joan>(1923)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국립극단 예술감독인 김광보 연출이 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로 명동예술극장의 무대에 끌어올렸다. 이 작품은 정치와 종교가 타락한 세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따르고 지키려 한 조앤이 어찌하여 그릇된 길로 들어서고 무너지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는 신념을 가진 자를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관해 논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신념의 조앤, 세상에서 불편한 존재

연극 <세인트 조앤> © 국립극단


1막의 조앤은 당차고 거침없다. 무기조차 쥐어보지 않은 시골 소녀가 계시를 받았다며 영주를 찾아와 자신을 병사로 명하고 군사를 내어달라고 청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후에 샤를 7세가 된 프랑스의 왕세자 앞에서조차 그가 왕위에 등극할 수 있도록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토록 거칠 것이 없는 조앤의 행동이 발하는 원동력은 굳건한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앤은 신의 계시라 여기는 마음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모든 걸 내던졌다.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과 필요에 의해 그녀를 반신반의하며 전쟁터에 밀어 넣었다. 백 년에 걸쳐 승부가 나지 않는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쟁에 지친 프랑스 시민들은 나태해진 정신력을 결집시킬 계기가 필요했고, 계시를 받았다고 부르짖는 시골 소녀 조앤에게 기대어 어느 쪽으로든 결판을 내보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이 결집력이 되어 전쟁에서의 승리로 이어지니 이로써 조앤은 살아있는 신화로 인식되었을 법하다.

신념의 힘은 그와 같다. 불가능한 목표와 대상도 가능하게 하는 것. 굳은 믿음에서 발현된 힘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신념이라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생각해본다. 신념은 인간이 가진 최대치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그로써 믿지 않았던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인간은 이를 기적이라고 부른다. 기적을 행하는 자가 성인이라고 할 때, 조앤은 그리하여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2막은 씁쓸하게 전개된다. 조앤은 스스로 병사가 되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냈다. 프랑스 땅인 오를레앙을 지켜냈고 왕세자를 샤를 7세로 등극시켰다. 그는 자신의 역할과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해 모든 걸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목표를 완성하기 위한 한 걸음으로 파리를 되찾아오자는 조앤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기득권들은 이를 외면하고 적당히 타협해 안주하려고 한다. 심지어 조앤이 왕으로 섬겨준 샤를 7세마저 그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조앤의 곁엔 아무도 없다. 그렇게 나선 전쟁터에서 포위당한 조앤은 결국 영국군에 포로로 넘겨지고, 종교재판을 받는다. 조앤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고 공로를 인정한 프랑스에서 몸값을 지불해줄 것이라 굳게 믿지만 여지없이 배신을 당한다. 


연극 <세인트 조앤> © 국립극단


절대적인 권위와 세력을 가진 교회와 군주의 세상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움직이는 조앤은 눈엣가시와 같은 불편한 존재다. 조앤은 다수에 대항하는 소수의 힘과 같은 상징이자, 이상주의적 인물이다. 교회와 왕조가 조앤의 계시에 감화받아 그의 추동에 동조해준 측면도 있지만, 사실상 백년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기득권 세력들이 눈앞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반신반의하며 그를 택하고 활용한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정체되었던 정치와 종교를 개혁으로 이끈 조앤은 기존 권력 구조와 질서를 고수하려는 세력에 의해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연극 <세인트 조앤>은 신념을 가진 자에 기대어 안락을 누리고 필요에 의해 토사구팽 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신념을 지키려 모든 것을 내던진 자를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너절한 핑계를 대며 외면하고 피하기에 바쁜 세상을 지적한다. 왕위에 오른 자도 오히려 역사가 의인을 잊어 주길 바라고 심지어 그것을 스스로의 공로로 가져오고 싶어 하는 세태가 작품에 여실하게 담겨 있다. 그러한 세태는 지금 21세기에도 여전히 세상에서 통용되는 행태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념을 가진 자는 독재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는 권위주의와 오만함의 극치인 엘리트주의로 인해 폄하당하고 집단 이기주의로 인해 희생된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조앤이 전쟁 영웅에서 한순간 이단으로 몰려 화형 당하는 과정에 중첩되어 있다. 중세 배경의 인물과 사건을 다룬 작품 <세인트 조앤>이 21세기인 지금 여기에 불려 나온 이유가 그것이다.


성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선택적 잣대

연극 <세인트 조앤> © 국립극단


조앤이 화형을 당한 지 25년 후, 종교재판을 번복하는 재판이 번복되고 그는 마침내 이단과 마녀라는 죄목에서 벗어난다.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서는 로마 가톨릭에 의해 성인 조앤으로 추앙된다.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2막 후반부 샤를 7세의 꿈속 장면을 빌어, 작품을 통해 자신이 진정 전하고 싶던 말을 한다. 조앤의 화형부터 복권에 관여한 인물들을 불러 모아 일종의 재판과 같은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들은 성인으로 추앙된 조앤에게 칭송을 빙자한 항변을 일삼는다. 그들 또한 신분이나 사회적 구조에 의해 그저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것뿐이라며 열성을 다해 항변한다. 이 장면에서 조앤은 이들에게 어떠한 압박도 없이 기꺼이 그들의 항변을 들어준다. 어떠한 면에서는 공감과 이해를 표현하면서 수긍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럼에도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광경이 희극적이면서도 또한 비극적이다. 그들이 참회하고 사과를 하더라도 역사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선택한 행동과 결과라 할지라도 조앤이 추구했던 진실은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오히려 강력하게 증명됐다. 때문에 옳고 그른 이치에 대해 우리가 지녀야 할 입장과 태도라는 건 결국 진실에 기반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에 조앤은 “그렇다면 내가 죽음에서 일어나서 살아있는 여성으로 당신들에게 갈까요?”라고 묻는다. 그러나 화형에 관여한 주교와 법관, 병사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들며 반대한다.

조앤은 필요에 의해 이용당하고 버려진 뒤 다시 복권되는 인물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조앤의 마지막 대사는 시사적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 세상은 언제가 되어야 당신의 성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까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 주님,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죠?”라고 묻는다. 

이는 결국 아직도 사람들은 숭고한 신념을 가진 자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 새로운 세상을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과 같다. 여전히 이기주와 권위주의, 엘리트주의에 사로잡혀 미래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믿음에서 오는 용기는 

그것이 비록 잘못된 믿음에서 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분노에서 오는 용기보다 오래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      조앤의 대사, 연극 <세인트 조앤> 중


국립극단에 기대하는 바

연극 <세인트 조앤>이 무대에 올려진 건 1963년 국립극단 공연 이후 처음이다. 김광보 연출가는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한국은 현재, 이념의 양극화”가 극명하다며 “진실이 어떻게 오도되고 망가져 화형에 처해지는지”를 조명하고 싶다고 말했다.

연극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 했다. 개인의 신념이 타인이나 사회적 구조에 의해 무시되고 짓밟히고 역전되어 결국에 사라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게감 있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며, 무대화한 가치와 의미가 충분하다. 동시대에 같은 무게의 울림을 전할 수 있다면 시간이 흘러도 작품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연극 <세인트 조앤> © 국립극단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극단은 2009년 단원제 폐지 후 프로덕션 시스템으로 재창단한 이래, 여전히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연극 <세인트 조앤>이 그 연장선상에서 변화의 방향에 일조할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동시대성을 화두로 삼고 있는 국립극단이 이후에도 훌륭한 레퍼토리 작품을 꾸준히 무대화하길 바라는 것은 오랜 연극 애호가뿐 아니라 한국 연극을 사랑하는 다수의 소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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