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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라희 Dec 08. 2022

영화 <밤쉘: 헤디 라마의 이야기> 내 목소리로 말하다

내 목소리로 나를 말하다

내 목소리로 나를 말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밤쉘: 헤디 라마의 이야기>(2017)


그녀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

<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2018) © gramfilms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라 했다. 우리는 만나고 스치는 인연 중 그 하나의 우주를 얼마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가. 눈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인간의 깊이와 너비를 판단하고 재단하는 건 어쩌면 그만큼 작고 좁은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는 셈이기도 하다. 생애 우리가 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그러한 데서 발현된지도 모른다.

다큐멘터리 영화 <밤쉘: 헤디 라마의 이야기 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2018)는 관능적인 영화배우로서 세상에 알려졌지만 실은 천재적인 발명가로 살았고, 죽기 전에야 노고를 인정받은 헤디 라마의 이야기를 담는다. Wi-Fi와 블루투스 등 현대 무선통신 기술의 근간이 된, 일명 ‘주파수 도약’이라는 보안 통신 체계를 발명한 이가 바로 그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밤쉘’은 깜짝 놀랄 만한 소식 또는 섹시한 매력을 가진 여성을 뜻한다. 작품은 두 가지 뜻을 모두 포괄하는데, 성적 매력을 발산해 인기를 모았던 여배우 헤디 라마를 지칭함과 동시에 그런 그녀가 발명을 해냈다는 놀랄 만한 소식을 알게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990년 당시 <포브스> 기자와 인터뷰한 헤디 라마의 육성 테이프를 바탕으로 그녀가 출판한 자서전을 기반으로 제작됐다. 

헤디 라마의 본명은 헤드비히 키슬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인 출신으로 꽤 부유하고 문화적 소양이 높은 집안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오페라를 보러 가고 승마를 배우고 사립학교에 다녔다. 은행장이었던 아버지는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어린 딸과 손잡고 외출하면 전차와 전선의 원리를 알려주던 사람이었다. 뮤직박스를 분리했다가 재조립하길 좋아하던 그녀는 화학 수업도 좋아했다. 어쩌면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과학자가 됐을지 모를 일이었다.

작품을 연출한 알렉산드라 딘(Alexandra Dean) 감독은 자신 또한 여성으로서 세상의 잣대와 기준에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토로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헤디 라마 이전에 헤드비히 키슬러라는 인물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이끌어간 그녀를 알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이 영화는 작품으로서도 구성력이 훌륭하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신화적 인물로서의 헤디 라마를 상징적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속 장면을 선택했다. 또한 과거 회상을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해 화면적 다양성을 추구했다. 나아가 헤디 라마의 목소리가 녹음된 인터뷰에 인생 기점별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한 영화 속 대사와 장면을 차용해 넣었다. 각종 사진과 영상 자료 등을 총동원해 헤디 라마가 아직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인물과 같이 생생함을 더했다.


아름답지만 굴곡진 삶

<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2018) © gramfilms


아름다운 외모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헤디 라마, 당시 열여섯 살의 헤드비히 키슬러는 거대 영화사에 들어가 1933년 영화 <엑스터시>에 출연한다. 감독의 디렉팅에 따라 호숫가에서 수영을 하는 장면을 찍고 거친 숨을 쉬고 팔을 모은 포즈를 연기했는데, 교묘한 편집으로 인해 그녀는 한순간에 ‘영화 사상 최초로 나체로 출연하고 오르가슴 연기를 한 배우’로 낙인찍혔다.

당시는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히틀러가 세력을 떨치던 때였다. 열아홉의 헤드비히 키슬러는 나치를 돕고 있었던 거대 군수업자와 결혼을 한다. 풍족한 환경에서 지냈지만 그녀가 원하는 자유는 없었다. 이런 와중에 그녀의 아버지는 ‘너 자신으로 살아라’, ‘원하는 삶을 택하고 누려라’라는 메시지를 주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다. 

헤드비히 키슬러는 아버지가 남긴 말씀을 새기며 도청까지 붙이던 억압적인 남편에게서 탈출해 자유를 찾으러 결행한다. 자신과 닮은 하녀에게 수면제를 탄 차를 주고 자금으로 쓸 보석을 주머니에 넣고 바느질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도망쳐 겨우 빠져나왔다. 그 길로 영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들어야만 해요”

 

자유를 얻은 헤드비히 키슬러는 자신의 삶을 당차게 개척해 나갔다. 영국에 정착해 스물두 살이 된 그녀는 영화관에 갔다가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영화배급사 MGM의 회장 루이 B. 메이어는 국경을 넘은 유대인 배우들을 소속시키려 혈안이었다. 헤드비히 키슬러에게도 제안을 했지만 그녀는 당차게 그 제안을 거절한다. 대신 루이 B. 메이어가 탄 뉴욕행 배에 탑승해, 자신이 유일하게 소유한 디자이너 드레스를 입고 보석을 두른 채 그의 눈에 띄도록 계속해서 얼쩡거렸다. 그리고 결국에는 메이어의 눈에 들어 헤디 라마라는 예명과 함께 고액의 개런티를 받고 초특급 신인 배우로 등극한다.

여기에 더해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십 기사로 유명한 헤다 호퍼 앞에서 대단한 연기를 펼쳐 언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강요 때문에 영화 속 누드 장면을 촬영했고 도덕관념이 없는 유럽 감독들에게 이용당했다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언론과 대중은 그녀에게 큰 관심을 쏟았다. 그녀는 순진한 모습으로 영악하게도 할리우드에서 자리 잡는 방법을 터득한 셈이었다.

그렇다고 할리우드에서의 삶이 그리 행복한 건 아니었다. 소속 계약서에 서명을 하면 7년간 영화사의 소유물이 되어 그야말로 경주마처럼 일해야만 했기 때문. 이를 두고 영화배우 베티 데이비스는 ‘노예 제도’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빨리빨리 많은 편수의 영화를 찍을수록 돈을 버는 영화사는 배우들에게 각성제와 수면제를 수시로 먹였다. 더구나 여배우들은 머리와 화장, 의상을 갖출 시간이 더 필요해 새벽부터 강행군이었다.


<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2018) © gramfilms


그렇게 밤을 새우고 집에 들어와서도 헤디 라마는 스트레스 해소 겸 취미 삼아 발명을 계속했다. 그녀의 발명 노트에는 아이디어와 각종 설계도, 시안 등이 가득하다. 헤디 라마의 이런 열정을 알고 제작자 하워드 휴즈가 그녀에게 대기실에서 쓸 작은 실험용 세트를 선물하기도 했다.

비행기 개발에 관심이 높은 하워드 휴즈에게 보다 가볍고 빠르고 오래 날 수 있는 비행기 구조에 관한 아이디어를 제시해 준 것도 헤디 라마였다. 그녀는 사각형 날개가 문제라고 지적하며 조류와 어류 도감 서적을 사서 ‘가장 빠른 새를 가장 빠른 물고기에 연결’해 두 종류를 결합한 비행기 구조를 제시했다.

또한 그녀는 전쟁 중인 군인들이 콜라를 마실 수 있게 두 명의 화학자와 함께 ‘각설탕 콜라’를 개발하기도 했다. 각 지역별 물의 농도와 비중이 달라 결국 실패한 연구로 끝나기는 했지만, 발명과 개발 연구에 대한 헤디 라마의 열정에는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2018) © gramfilms


헤디 라마, 그녀는 생이 다할 때까지 자아를 찾고 발전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소녀와 같은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삶에 밀려온 온갖 고난에도 스스로를 놓지 않았고, 세상 속에서 희미해지고 지워지는 자신의 존재를 끝까지 붙들고 선명하게 보여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나아가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다.

아름다운 외모에 가려진 헤디 라마의 큰 그릇, 세상을 감싸 안으려 한 그녀의 노력은 결국 우리 곁에 서로와 세상을 연결하는 무선 신호로 남아 그 빛을 발한다.


사람들이란 비이성적이고 논리도 없고 자기중심적이지요.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하세요

좋은 일을 하면 이기적인 다른 동기가 있다고 비난할지 몰라요

그럼에도 좋은 일을 하세요

가장 큰 생각을 가진 대인배가

가장 작은 마음을 가진 소인배에게 무너질 수 있어요

그럼에도 크게 생각하세요

몇 년이 걸려 지은 것도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수 있겠죠

그럼에도 지으세요

당신의 최고를 세상에 주고 호되게 공격당할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최고를 세상에 주세요

-      헤디 라머, 포브스 기자와의 인터뷰 중 마음에 드는 구절이라며 읽어준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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