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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라희 Dec 08. 2022

연극 <에쿠우스> 초자연적 인간, 신적 존재에 올라타다

초자연적 인간, 신적 존재에 올라타다

초자연적 인간, 신적 존재에 올라타다

연극 <에쿠우스>


미묘하고 강렬한 에너지

<에쿠우스> © 극단 실험극장


마음속 불길이 활활 타올라,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져서, 나 스스로를 집어삼킬 만큼 뜨거운 마음의 상태였던 때가 언제였을까. 무모하리만치 모든 걸 쏟아붓는 뜨거운 그 무엇은, 어쩌면 사회가 원하는 구성원의 모습을 갖추면서 거세되고 박제되어 마치 박물관 속 유물처럼 찬란한 저 너머 신화의 기억으로만 남아버린 건 아닐까. 

연극 <에쿠우스>는 소년 알런의 말 너제트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를 통해 엿보면서 새삼 내 마음 안의 상태를 들여다보게 한다. 극적인 에너지가 너무도 강렬해서 극장을 나오고서도 그 여운이 한동안 주변을 휩싸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곱씹을수록 할 말을 잊게 만드는 묘하고 대단한 작품이다.

첫 장면, 알런은 말 너제트에게 밀착한 채 그의 숨과 땀과 온기를 자신의 온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를 두고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는 '마치 목을 껴안고 애무하는 연인들'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숨막히게 아름답고 또한 에로틱하다.

모든 발단은 열일곱 소년 알런 스트랑이 자신이 주말에 일하던 마구간의 말 26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사건에서 시작된다. 이 사건을 담당한 헤스터 살로만 판사는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에게 알런이 왜 말들의 눈을 찔렀는지를 알아내 달라며 진료를 요청한다. 

광신도인 어머니 도라와 강압적인 아버지 프랭크는 진료실에 번갈아 찾아와 자신들이 아들 알런을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지 항변한다. 섬세하고 여린 알런에게 가닿은 부모의 에너지는 감당할 수 없는 압박이 되어 결국 예상치 못한 대상에게 덧씌워지고 분출되어 솟구친다.

무대 양 벽면은 알런의 분노인 듯 그가 찌른 말의 선연한 핏줄인 듯 붉은 기둥이 양쪽에 솟구쳐 있다. 중앙부 낮은 기둥이 세워진 사각형의 전면 무대는 현실적 공간으로, 마틴 다이사트의 진료실이자 알런의 집 거실, 영화관, 거리 등으로 활용된다. 단이 높게 조성된 후면 무대는 알런의 공간이자 미지의 세계이다. 알런의 방이자 그의 치료실이기도 하며, 알런이 환상에 빠져 있거나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에쿠우스, 신격화된 말

<에쿠우스> © 극단 실험극장


턱을 넘어 가슴팍까지 길게 늘어뜨린 말 가면, 머리에서 어깨까지 이르는 황금빛 털실 머리칼이 탐스럽다. 안장을 씌운 듯 가죽 재질의 어깨 바와 허리 벨트, 가터벨트 등이 말로써의 위용을 더한다. 이른바 ‘말 근육’이란 이런 것인가 싶은 잘게 쪼개진 근육이 온몸에 틈틈이 박힌 말 역할의 배우들, 이힝힝~츄 하는 말 특유의 킁킁대는 소리, 무릎을 들었다가 내리찍듯 턱턱 옮기는 발짓이 어쩌면 그리도 말의 발딛음과 닮았나 싶다. 이들은 말의 움직임과 소리 등을 면밀히 관찰해 마구간에 들어와 있는 듯 생생한 말들을 연기했다.

말, 당나귀, 노새 등 말과(科)에 속하는 동물들은 학명이 ‘Equus’로 불린다. 에쿠우스는 라틴어로 말(馬)이라는 뜻이다. 제목에 전면적으로 내세워진 만큼 이 작품에서의 말의 존재감이나 의미는 이렇듯 중요하다. 

연극 <에쿠우스>에서 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극적 사건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알런이 한밤 중에 마구간으로 몰래 들어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말 너제트를 타고 밖으로 나와, 초원에서 옷을 모두 벗고 말 등에 올라타는 장면이다. 이는 알런이 말을 타고 느끼는 자유와 환희, 알런이 처한 갖은 속박과 굴레에서의 탈출을 의미한다. 알런과 말 너제트의 관계와 극적 의미는 인간으로서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접한 가장 자연적인 대상인 말의 합일이다. 

알런에게 말은 신화적인 또는 신격화된 존재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처음 타본 말이 준 강력한 생명력,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성이 알런에게는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대상으로 다가왔다. 신적 존재와 접하는 그 순간만이 알런이 진정한 자신으로서 오롯이 서 있을 수 있는 순간이다.

이 때문에 무대에서 보여지는 알런의 알몸에 대한 언급은 가장 솔직하고 진실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대에서 배우가 표현한 말 근육과 움직임은 그 생명력이 알런에게 또 다른 삶의 에너지로써 직접적으로 와닿을 수 있기에 중요하다.  1막의 마지막이기도 한 이 장면은 관객에 있어서도 무대에서 전해져 오는 강력한 열정의 에너지가 그대로 흡수되기에 그 여운이 강렬하다.


<에쿠우스> © 극단 실험극장


또 다른 장면은 알런에게 호감을 느끼는 소녀 질과 마구간에서 성교를 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알런이 느끼는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는 결국 자신이 가장 아끼고 드높이며 신격화했던 말들을 해치는 행동으로 폭발된다. 자신을 지켜보는 신들의 눈처럼 느껴졌던 알런에게는 마구간에 가득 찬 말들의 시선이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이 그 대상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그에 맞서고 싶다는 의지, 그토록 원했던 신적 존재에게서 버려질 것만 같은 좌절감 등이 뒤엉킨 장면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장면의 의미와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작품의 기획의도와 주제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이와 상관없이 이 작품에 대해 자극적으로 묘사한 언론과 일부 관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해당 장면에 대해 단순히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목적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희곡에서 묘사된 알런의 누드 장면은 1974년 반전과 반문화운동이라는 사회적 저항으로 해석되고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스트리킹이 유행하는 현상을 빚어내기도 했던, 의미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대조적인 인물 구도, 그러나 동일한

<에쿠우스>의 배우 다이사트 역 한윤춘, 알런 역 김시유 © 극단 실험극장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년 알런과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는 인물 구도적으로 대척점에 배치된, 대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또 서로를 향하는 동일한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연극 <에쿠우스>는 작품적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작품이다.

우선 마틴 다이사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비록 시골 의사이기는 하나, 지식인이자 전문가로서 법원에서 종종 자문을 청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공고한 사회적 위치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그 좁은 정신과 진료실을 탈출하고 싶어 한다. 한번 그곳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극 초반부 다이사트가 자신의 꿈에 대해 말한다. 황금 가면을 쓰고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돌에 치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는 모습의 자신을 묘사하는 대사다. 이는 그의 깊은 곳에 내재된 야생성과 폭력성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가 진료를 통해 만나는 대상자들에 대한 죄책감을 표현한다. 나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만 위장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자신의 마음속 저 깊은 바닥에 끓어오르는 욕망을 꾹꾹 누르고 살아가고 있다. 그가 휴가 때마다 찾아가는 그리스는 신화 속 신들의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소통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평소에는 그리스 유적지 사진집이나 들춰보고 복제된 조각상이나 만지작거리며 위안을 찾는 자이다. 그렇기에 그가 알런을 마주하고는 정신과 상담을 빙자한 대화를 통해 그의 경험을 전달받고 환희와 대리만족을 느끼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쿠우스> © 극단 실험극장


때문에 다른 측면에서 소년 알런은 마틴 다이사트의 또 다른 자아와 같은 존재이자, 이상향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마틴을 닮았다고도 볼 수 있다. 쳇바퀴 같은 삶을 반복하고 사랑이 없는 결혼을 유지하며 일상을 무기력하고 무미건조하게 살면서 그는 알런을 보고 오랜만에 가슴 뛰는 긴장과 설렘, 열정을 느꼈을 것이다. 마틴 다이사트가 정신과 진료의 명목 하에 알런의 열정과 순수를 거세시켜 완벽하게 사회적으로 적응된 인간으로 만드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에 회의감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의사는 열정을 파괴할 수는 있어도 창조할 수는 없’기에.

성적인 욕망이나 감각을 자극한다는 뜻의 ‘에로틱’이라는 표현은 다른 말로 인간 본성, 욕망이 그대로 투영되는, 자연에 매우 가까운 상태를 말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알런이라는 인물은 순수하고 열망이 가득한 인간의 표상으로서 초자연적인 신비한 존재로 자리한다. 그 대척점에서 마틴 다이사트는 그러한 초자연적인 대상을 선망하고 자신은 그러한 상태가 될 수 없는 걸 알기에 때로는 질투에 사로잡히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에쿠우스에 올라탄 우리

영화 <에쿠우스>(1977) 포스터 © Wincast film Production


이 작품을 쓴 작가 피터 쉐퍼(Peter Levin Shaffer, 1926~2016)는 친구가 들려준 범죄 사건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얻었다. 전후 사정은 제하고 실제 사건에서 가장 자극적인 부분만 들려줬던 그 친구는 몇 달 후 세상을 떠났고,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왜 소년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됐는지 심리적으로 추리하고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창작해 나갔다고 한다. 

피터 쉐퍼가 쓴 원작 희곡에는 여섯 마리 말의 움직임이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무대적으로 구현된 말의 모습과 그로부터 뻗어 나오는 에너지를 염두에 두고, 마임으로 말을 연기할 배우들을 위한 지문을 써두었다. 때문에 1977년 제작된 영화 버전도 있지만 이 작품은 연극으로 관람하는 게 좋다. 무대에서 말을 표현하는 외적 이미지도 나라별로 다르다. 영국과 뉴욕 공연에서는 말 역할의 배우들이 철제 가면을 쓰고 높은 말발굽을 신어 위압감을 표현했다면, 한국 공연에서는 말 근육이 주는 생명력에 초점을 두고 가죽 팬티에 부츠를 신고 말갈기와 같은 헤어와 메이크업으로 말의 모습을 표현했다. 이러한 차이도 관극의 묘미일 것이다.

1973년 7월 영국 국립국장 올드빅에서 초연된 <에쿠우스>는 다음 해인 1974년 10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고 오스카 작품상과 연출상,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다. 한국에서는 1975년 극단 실험극장에서 초연을 했으니, 이 작품도 공연한 지 어언 47여 년이 되었다. 그 사이 이 작품을 거쳐간 배우들은 알런 역할을 맡았던 20대에서 마틴 다이사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40대 중견 배우로 자리 잡았다. 더불어 당대 뛰어난 연출가들에게는 연출적 기량을 선보일 수 있어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피터 쉐퍼가 70년대에 쓴 <에쿠우스>가 2022년에도 다시금 불려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 중 인물 다이사트와 같이 철저히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우리가, 알런이 그러했던 것처럼 억눌렸던 야성성을 표출하고 온전한 초자연 상태로서의 자신을 다시금 찾고 싶기 때문은 아닐지. 삶에 대한 에너지가 바닥났을 때, 우리는 극장을 찾는다. 원초적 자아에 대한 열망이 가득할 때, 연극 <에쿠우스>를 만난다. 메타버스와 AI가 세상을 가득 채우는 지금에도 사람들이 극장을 찾고 연극을 보러 오는 이유다.


알런: 와!.. 와!... 황홀해!

나는 단단하다! 바람 속에서 빳빳해진다!

내 갈기털이 바람 속에서 빳빳해진다!

내 옆구리! 내 발굽!

내 다리와 내 옆구리의 갈기털이 나부낀다. 채찍처럼!

알몸! 알몸! 알몸!

나는 알몸이다! 알몸!

네 몸 위에 있는 나를 느끼는가! 네 몸 위에! 네 몸 위에! 네 몸 위에!

네 몸 안에 들어가고 싶다! 너와 하나가 되고 싶다!

영원히 영원토록!

에쿠우스, 너를 사랑해!

자! 날 데려가 줘!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하나! 하나! 하나! 한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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