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필라테스를 시작하게 된 이유(1)

스물아홉의 평범한 하루. 나는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

by 볕뉘
끔뻑끔뻑


흐릿한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고 어둠이 걷힌다. 알람이 아직 울리지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이런.' 평일 나를 좀비처럼 깨우는 무서운 출근 습관이 주말인 오늘도 날 깨운 모양이다. 깨지 않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자고 싶었는데, 오늘도 기어코 나를 깨웠다. 평일에는 깨워줘서 고맙다가도 주말에는 좀 밉다. 습관조차 좋기만 한 건 없나 보다.


멍하니 왼편으로 손만 뒤적뒤적 이불 위를 훑어 휴대폰을 찾는다. '찾았다.' 오늘은 달콤한 주말이지만 필라테스 11시 수업을 예약해서 혹시 일어나지 못할까 봐 8시 30분에 알람을 해놓았다. 사실 난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날 걸 알고 있었다- 주말이면 미운 그 습관 때문에. 그렇지만 알람은 구명조끼니까 입어야지. 바다에서 수영을 잘해도 힘이 빠지거나 쥐가 나면 구명조끼가 두둥실 가라앉지 않게 지켜주는 것처럼, 알람이 잠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날 건져줄 테다.


구명조끼가 있으니 눈을 더 감아볼까 했으나 실패! 눈을 감고 내가 부른 건 잠인데- 부르지도 않은 창밖의 소리, 시계의 째깍째깍 소리, 냉장고의 우웅 소리와 같은 소리들만 온다. 결국 '너네가 이겼다.'하고 그들의 승리를 인정해 주고 일어나 세수를 한다. 간만의 여유로운 주말 아침이다. 아침을 먹고 필라테스를 가기 전에 생긴 시간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밀리의 서재를 켜본다. 뒤적뒤적 보고 싶은 책은 많아 큰 마음먹고 1년 구독을 신청해놓고, 일이 많아 피곤하니 바빠서 틈이 생기면 집중하고 싶지 않아 켜지를 못하고 있다. 들어가 책을 읽을 때면 뜨는 '1밀리 적립'이 오랜만에 보는 글씨일수록 '윽'하고 뜨끔하며 찔려 한다.



지나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 것


그러다 시간이 되어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따릉이를 타고 필라테스를 하러 갔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빗방울이 조금 떨어져서 쫄딱 젖어서 운동을 가게 되는 최악이 떠올라 열심히 페달을 밟아 무사히 도착해서 자전거를 반납하고 필라테스 건물로 들어갔다. 필라테스를 시작한 지는 2주일 정도가 되었다. 신생아이다 못해, 아직도 가보지 않은 필라테스 공간이 있어서 오늘도 직원분에게 'OO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라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부끄럽지만 필라테스를 하러 가면 다들 똑같은 수강생이어도 나보다 한참은 잘하는 것 같아서, 소심하게 쭈글해지고 정시 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을 서성이던 날도 있었다. 수업을 듣다가도 무슨 용어인지 알지 못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겨우 따라 하기 바쁘다.


원래는 집 앞 아파트 단지 지하에 있던 헬스장에서 1년에 12만원을 내고 운동을 아주 간간이 하다가 지하인 게 답답해서 뛰쳐나왔다. 때마침 일을 시작하던 때라 나를 위한 투자를 기꺼이 하겠다며 의욕에 넘쳐 필라테스, 요가, 커브스 등을 다 알아봤었는데.. 그게 2년 전쯤인데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 단어로 그때를 기억할 거다. 바로 '코로나'. 코로나가 홀연히 등장해 확산되면서 지금보다 더 불명확하고 알 수 없는 질병에 지레 겁을 먹고 알아보았던 필라테스, 요가, 커브스 다 무산. 부모님이 걱정된다며 실내 운동을 결사반대하신 것도 큰 요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환자 수도 훨씬 적었던 때인데 그냥 할 것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지나고 나서야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서 그 이후로는 러닝만 계속했다. 뛸 때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좋았고, 실내가 아니고 실외라서 바람을 쐴 수 있고 결국은 익숙한 데로 갔지만 발길이 닿는 대로 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바람이 조금 선선해지면 러닝의 무궁무진한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올 것 같다. 그런데 실외라 좋았는데 실외라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 비가 퍼붓거나 눈이 펑펑 내리면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이 한편에 늘 있었지만, 돈도 부담되었고 코로나로 실내 시설을 같이 쓰는 것도 신경이 쓰여서 포기한 채로 지냈다. 가면 가는 대로, 못 가면 못 가는 대로 그냥 그렇게. 그러면서 어느덧 일을 한 지도 2-3년이 되었고 여전히 벅차고 힘들지만 조금 적응했다면 적응도 하게 되었다.



의미 있게 살고 싶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필라테스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러닝에서 필라테스로 넘어오기 전에 한 달간의 우당탕탕 스쿼시 체험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겨본다. 올해 초부터 일이 내가 한 만큼 결과나 보상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과정에서 의미가 없다고도 느껴져서 힘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물아홉이 되고 보니 예전에 서른이면 참 어른 같았고 내가 서른 즈음이면 멋진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의 나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고 어른 같지 않다고 느껴져서 우울했다. 한참을 그런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가 계속 이렇게 무의미하다고 느끼면 너무 불행할 것 같았고, 의미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해지기로 했다.
지금 어른 같지 않다면?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난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 다음 이야기 > 어른이 되기로 한 것과 필라테스가 무슨 상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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