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랜드 8500 에비뉴.
미국에 와서 만나게 된 내 지인들은 "직업이 뭐예요?"라고 묻지 않았다. 다들 집에서 살림하는 것이 내 직업임을 알기에. 그러나 남편을 통한 사람들을 만나면 내게 묻는 질문이 있었다. "What do you do?" 무슨 일을 하냐고.
남편의 직업은 미국 군인이다.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미군 와이프들은 살림을 한다. 파병과 이동이 잦은 직업이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대부분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에 묻지 않았다. 서로 상황이 비슷하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끔 특정 인종의 와이프들은 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물었다. "WHAT DO YOU DO?"
나는 그럴 때일수록 비꼬아서 대답했다. "집에서 요리하고 청소해요."그럼 두 눈이 똥그래지며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 내가 다시 "하우스 와이프 (주부)에요."라고 대답하면 그럼 그렇다는 듯 대화는 지나간다.
처음엔 뭐하는지 뻔히 알면서, 얼마 전 미국으로 이주한 외국인인걸 알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싫어서 비꼬아 대답을 했다. 시간이 지나 다시 되돌아보니 그런 의도가 정말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주부"라는 직업에 대해, "살림"이라는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이자 자격지심이었다.
이 문제로 나는 남편에게 한동안 고민을 토로했다. 어떤 직업을 다시 가져야 할지,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그럴 때마다 "집안일을 맡아줘."이라는 대답이었다. 내 대답은 "나도 무언가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일을 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어!"라는 대답을 여러 번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서로 잘하는 일을 하자."였다. 나는 집안일을 남편보다 잘하고, 남편은 나보다 돈을 더 잘 버니까. 성 역할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역할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살림을 잘하면 하겠지만 정말 남편은 내가 봐도 너무 못하고 무엇보다 하기 싫어한다. 그리고 나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사회생활을 매우 즐겁게(?)한다. 나는 생각보다 살림을 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요리하는 건 재밌고 적은 양의 손 설거지는 매우 즐겁다. 화장실 청소를 할 땐 희열을 느낀다. 단, 빨래는 싫지만.
살림을 재밌어하는 걸 스스로도 어느 정도 알면서 내 무의식 속엔 집안일보다 바깥일, 사회생활이 더 값어치 있어 보였고, 무의식 중에 심어진 인식인지 몰라도 내게 살림이란, 일도 하고 아이도 기르며 겸사겸사하는 할 수 있는 것이였다.
그러나 살림을 하다 보니 어떤 날은 하루가 다 갈 정도로 시간도, 에너지도, 마음도 많이 쓰이는 일이었다. 살고있는 나라의 특성상 외식비가 비싸고 식료품이 저렴하다. 식료품 역시 모두 한 군데 모아놓으면 좋으련만. 한 번에 살 수 있는 곳들이 없어 보통 3-4군데를 돌아다니며 장을 봐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사람을 쓰는 일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나라인지라 금전적으로도 내가 집안일을 전적으로 맡아하는 것이 이득이다.
주기적으로 가지고 있는 냄비, 팬들을 관리하고, 행주를 정리하고, 찬장, 옷장도 계절별로 정리하다 보면 살림의 세계에 놀란다. 집안일도 세분화해서 보자면 주방, 욕실, 침실, 청소, 인테리어 등 여러 분야로 나뉘었다. 세상에,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작은 우주가 이 곳에 있었다. 내공 100단의 주부님들을 보면 그분들의 집은 어떻게 깨끗하게 관리가 되는지 또 예쁜지. 주부 1단이 100단을 따라가려면 노력도, 시간도 비용도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살아도 살아지는 것이 집안일이라면 맘먹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려면 시간, 노력, 비용도 상당히 들어가는 것이 집안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내 남편이 남자라서,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랬다. 내가 괜히 남자는 돈을 벌고 여자는 살림을 한다는 전통적인 이 문장에 반감을 가지고 무작정 싫다고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사회생활에 크게 즐거움을 느끼며 돈을 벌지 않았었다. '돈을 꼭 벌어야 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 막상 주부로서 살게 되니 그리 행복하지만 않았던 사회생활을 왜 하고 싶었을까. 나도 돈을 벌 수 있음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서로가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사회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림을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할 수록, 나의 가족 발란스 맞춰 잘 먹이는 일, 정성스럽게 한 끼 식사를 준비하는 일, 집중적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집을 만들고 관리하는 일, 깔끔한 옷을 입고 나가도록 준비하는 일 등 집안일은 가치 있는 일임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집이 깨끗해질 때, 내가 좋아하는 그릇에 정성스럽게 차린 한 끼를 낼 때,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관리할 때. 결혼 전 내 머릿속으로 그리던 살림은 별로일거라 상상했었는데 내가 주체적으로 해 나가는 "살림"은 매우 재미있다. 음식도 맛깔나게 잘하고 싶고, 청소도, 집안 관리도 잘 하고 싶다.
10년 후 내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살림 왕!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지금 나의 메인 직업은 "주부"이며 하는 일은 "살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