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 첫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입사를 하고 10년이 흘렀다.
여기는 5,6호선(지금은 경의선, 공항철도까지 개통이 됐다.)을 함께 운영하는 마포 교통의 중심지 역이다.
6호선에서 4년 6개월을 편하게 근무하다가 이곳으로 발령 나서 오게 됐다.
역 생활 10년이 지나면서 반복적인 업무들이 익숙해졌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출근해서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승객들을 다루는? 기술도 많이 늘었다. 전에 같으면 원리 원칙대로 대응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사라지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면서 지낸 거 같다.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아파트 대출을 갚기 위해 우리 부부는 '본가'에 얹혀살았다. 기존 집을 전세로 주고 3년 동안 모아서 대출을 갚자고 아내와 어머니가 결정을 했다. 같이 사는 문제는 어려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난 추천하지 않는다.) 아내를 닮아 잘 생긴 아들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주로 집-회사-집을 반복하며 지냈다.
야간, 비번 날이면 출근 전 퇴근 후 아이와 함께 보내야 했다. 알다시피 아이의 에너지는 쉽게 식지 않는다.
난 점점 지쳐갔었다. 어머니가 계셨지만 육아방식이 맞지 않아서 초반에 신경전이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계셔서 육아에 도움을 많이 주셨다. 감사합니다.
아침저녁으로 퇴근을 하면 동네 사거리를 지나서 온다. 지친 몸으로 집으로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신호등에 막혀 건널목에서 서 있었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차임벨 소리가 났다 "땡" 몇 불후 다시 "땡"
난 주위를 살폈다. 건물 위에 복싱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복싱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야, 지금 시간이 없어.'
'집에서 쉬어야지. 무슨 운동이야'
'그래도 남자라면 복싱 한번 해 봐야 하는 거 아냐?'
'가 볼까?'
'에휴, 아니다. 집으로 가자'
이런 생각을 일 년 동안 해 왔다. 바로 실행하지 못했다.
용기를 내서 신용카드를 들고 복싱장에 들어갔다. 실내에는 땀 내음과 여기저기서 내는 '쉭 쉭'소리가 났다.
관장님은 생각보다 나이가 젊어 보였다. 관장님과 상담을 하고 바로 6개월을 끊었다. 이렇게 나의 3년 동안의 복싱은 시작됐다.
줄넘기로 몸을 풀었다. 거울을 보고 스텝을 했다. 한 주일이 지날 때마다 진도를 나갔다. 주먹을 뻗기 시작했다. 샌드백을 신나게 쳤다. 쉭쉭 거리면서(흐흐) 관장님이 한 번씩 잡아주는 미트는 나를 바닥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마무리로 줄넘기를 한 후 끝마친다.
거울을 보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관장님이 다가와서 '마우스피스'를 만들자고 하셨다.
"네?"
"오늘 한 번 스파링 해보자"
"......."
첫 경험은 누구에게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나에게 스파링이 그랬다.
링 위에 올라갔다. 처음으로 마우스피스를 끼고 머리에 헤드기어를 착용했다. 숨은 안 쉬어지고 시야는 답답했다. 상대방은 체격은 나와 비슷했다. 체대를 나왔고 1년 동안 복싱을 했다고 들었다. 난 상대방에게 처음이니 살살해달라고 부탁했다.
"땡" 시작 차임벨이 울렸다.
생각한 만큼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배운 대로 되지 않았다.
어깨와 주먹에 아령을 쥔 것처럼 무거웠다.
난 2분도 버티지 못했다.
맞아서가 아니다.
버티기 힘들어서 손을 들었다.
힘들어도 졌어도 내가 살아 있는 걸 느꼈던 하루였다.
다시 심장이 뛰고 있었다. 흐르는 땀이 눈을 맵게 해도 좋았다.
체중은 8킬로가 감량됐다.(주변에서 아프냐는 말도 들었다.)
이후 복싱장에서 다양한 직업(군인, 경찰, 화가, 의사, 사업)을 갖고 있는 형, 동생들과 친해졌다.
지하에서 나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분들과 함께하면서 매너리즘을 조금씩 조금씩 벗기게 됐다.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정말 복싱 잘하는 사람 많다. 겸손해야 한다.)
(힘들어도 한 계단씩 올라가겠습니다.)
(매너리즘도 좋은 경험입니다. 몸으로 맞아 보겠습니다.)
선배 복서분들이 해 주셨던 이야기가 기억나네요. 잘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