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더 글로리' 파트 1을 보고
넷플릭스 '더 글로리'는 연말에 보기엔 너무나 슬프다.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이 희생 됐다. 원작을 각색하는 것이 아닌 오리지널을 써 내려가는 작가의 낡음이 느껴질 때, 나 역시도 낡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감하게 된다. 낡음을 포장하기 위한 파격을 선택한 '더 글로리' 파트 1은 부자연스럽다.
'더 글로리'는 유년 시절 폭력으로 영혼까지 부서진 한 여자 문동은(송혜교 분)이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와 그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야기다.
이 복수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원인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박연진(임지연 분)과 친구들은 문동은을 죽일 것처럼 괴롭힌다. 단순히 학교를 넘어서 집까지 찾아가서 지독하게 괴롭힌다. 문동은은 우는 것 이외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는다. 저항하지 않는 아이를 집까지 찾아가서 악랄하게 괴롭히는 것은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김은숙 작가의 낡음이 보인다. 아무런 이유 없이 괴롭혀야 이후에 15부 내내 펼쳐질 잔혹한 복수가 정당해 보일 것이라는 것. 하지만 한국 시청자들은 아무런 이유 없음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더 글로리'는 복수극을 내세우기 때문에 로맨스조차도 더 깐깐하게 볼 수밖에 없다. 문동은과 주여정(이도현 분)이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은 순도 100% 우연이다. 첫 번째 우연은 두 사람이 같은 병원 응급실 옆침대에 입원하게 되는 것. 심지어 주여정은 그 병원장의 아들이자 인턴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주여정은 의사를 지망하는 인턴이 환자의 개인정보를 가지고 학교까지 찾아가는 섬뜩한 짓을 한다.
두 번째 우연은 KTX안에서 벌어진다. 같은 시각, 같은 칸에 아는 사람이 만나게 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첫 번째 우연과 두 번째 우연이 겹치는 것은 더 드문 경우다. 물론 우연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을 운명으로 풀어내는 과정은 매끄럽다. 하지만 첫 번째 우연과 두 번째 우연을 마주한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진지하게 보기 어려워진다. 풀기 어려운 매듭을 우연히 풀어버릴까 걱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복수극의 가장 큰 조력자인 강현남(염헤란 분)을 만나는 것 역시도 우연 범벅이다. 매 맞는 여자들의 심리에 대해서는 유튜브만 검색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매 맞는 아내들은 살기 위해 가정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 흔한 일이다. 도망갈 용기도 없는 여자가 6개월간 쓰레기를 가져가는 여자를 조용히 사진을 찍고 남편을 죽여달라고 거래를 제안하는 것은 단언컨대 현실성이 전혀 없다.
드라마라고 용서하라고 하기엔 이 드라마는 복수극이고, 능력과 비중이 뛰어난 조력자는 그렇게 주인공과 만나서는 안된다. 평생을 걸친 복수의 파트너를 고르는 일에 문동은은 보다 더 공을 들여야 했다. 자신이 하려는 일이 학폭 가해자들끼리 서로 배신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일인 만큼 더욱더 잔혹한 검증을 거쳐야 했다. 김은숙 작가는 강현남에 대한 검증 보다 우정을 택했다. 그 결과, 드라마의 진지함은 더욱더 볼품 없어졌다.
우연히 만난 강현남은 경찰도 시대가 달라져하기 힘들다고 고백한 누군가의 뒷조사를 혼자서 그 어떤 조직보다 뛰어나게 해낸다. 운전도 사진도 독학해서 그 어떤 전문가보다 확실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일정을 알아내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현실에서 문동은이 필요한 정보를 척척 대령한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상황을 되짚어 추리까지 해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문동은은 강현남에 대한 어떤 검증도 하지 않았다.
복수극에서 우연을 이토록 싫어하는 이유는 20년 전인 2003년에 나온 영화 '올드보이'에서 작은 우연도 설계가 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김은숙이라는 이름을 보고 '올드보이'를 기대한 것을 양아치라고 한다면 그 비난은 달게 받겠다.
'올드보이' 이야기를 자꾸 해서 미안하지만 우진에 비해 학폭 가해자 집단의 지능은 너무나도 저열하고 대응조차 예상 가능하다. 복수해야 하는 적이 너무나 무기력하고 수준이 낮아서 문동은은 잔잔하게 별다른 위기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복수를 이어나간다. 고작 저런 애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것이 맞나라는 생각조차 들게 된다. 짜릿해야 할 복수의 카타르시스는 옅어져만 간다.
돌고 돌아서 하얀 머리로 제작발표회에 등장한 김은숙 작가는 자신감을 보여주려고 했겠지만 작품에서 보인 것은 선명한 세월의 흐름이었다. '더 글로리'의 나머지는 3월에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