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 Feb 02. 2020

영화라는 거짓말에 대하여

'최악의 하루'를 보고


영화는 모든 것이 다 거짓이다. 주인공들이 만나는 장면에서 비치는 햇살과 나무도 감독의 의도대로 그 프레임에 들어갔을 뿐이다. 당연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대사도 거짓이다. 우리를 웃게 하고 울게 만드는 장면들까지도.


영화 ‘최악의 하루’는 무명 배우인 은희(한예리 분)가 처음 만나는 남자, 지금 만나고 있는 남자 그리고 과거에 만났던 남자들과 마주치면서 어처구니없고 웃긴 하루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는 지질함도 상큼함도 귀여움도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은희의 하루를 따라가다보면 우리의 두피 아래 저장된 수많은 연애에 대한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만큼 영화 속 상황들은 현실적이다. 정확히 나 혹은 우리의 현실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나도 저랬었지'라는 공감이 든다.


‘최악의 하루’의 시작은 료헤이(이와세 료 분)의 독백이다. 무엇보다 료헤이를 연기하는 이와세 료는 이 영화에서 거의 한국말을 쓰지 않고 대부분 영어로 말하며 가끔 일본어를 쓴다. 역시나 모국어인 일본어로 연기 할 때, 가장 빛이 난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소설가인 료헤이와 은희(한예리 분)는 영어로 서로 대화를 한다. 료헤이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연기를 하는 은희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소설가의 소설은 객관적인 사실의 기록일지라도 그것이 그 소설 속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연극을 하는 은희도 마찬가지다. 배우와 소설가 모두 한없이 사실에 가까워지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거짓말의 연속이며, 거짓말을 하는 두 사람의 감정은 진실처럼 다가온다.


남산으로 간 은희는 아침 드라마를 촬영 중인 신인 배우인 남자친구 현오(권율 분)와 만난다. 짙은 선글라스에 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나타난 현오는 한없이 가볍고 치사한 남자다. 은희는 현오에게 료헤이와 만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자기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거짓말’한다.


현오와 헤어진 은희는 정처 없이 남산을 헤매다가 자신의 SNS를 보고 찾아온 전 남자친구인 운철(이희준 분)을 만난다. 은희와 운철은 서로 피해자 코스프레에 열중한다. 은희는 자신이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혼남 운철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거짓말을 하고 운철은 그런 은희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운철은 ‘행복해지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는 명대사와 함께 아내와 재결합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운철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배반당한 은희는 결국 눈물을 터뜨린다.


여기서 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운철은 은희와 그의 아내에게 거짓말했을지라도 현재는 은희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운철은 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하다. 문제는 운철이 유부남이고 전 부인과 재결합하기로 했지만 은희와 계속 만나고 싶다는 한없이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운철은 은희를 설득하기 위해 지독하게 수작을 건다.


하지만 은희에게 운철의 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진심을 알게 되자 더는 볼일이 없어진 운철을 떼어 내기 위한 눈물겨운 은희의 거짓말이 시작된다. 둘의 답 없는 승강이를 지켜 보진심에 거짓으로 대하는 은희가 나쁜 것일지. 아니면 진실이라는 것 빼고 존중할 가치가 없는 운철이 나쁜 것인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드러나는 운철과 은희의 밑바닥은 마냥 웃기지만은 않다. 그의 진심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은희의 모습은 슬프고 감동적이기 까지 하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려는 은희의 거짓말은 눈치챈 운철은 ‘어떻게 진실이 진심을 이깁니까’ 라는 두 번째 명대사를 던진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진실보다 진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실보다 중요한 진심은 많지 않다. 대부분 폭력은 진심을 강요하는 이들이 저지른다. 흔히 가족 같은 회사라고 칭하며 불합리한 야근을 시키고 터무니없는 임금을 준다거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되는 가정 폭력 거기에 더해 데이트 폭력과 이별 살인까지 진심의 탈을 쓴 온갖 종류의 폭력이 난무한다. 내가 아는 상당수의 살인 사건은 자신의 진심을 몰라줘서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발생했다.


운철과 은희의 만남 이후에 영화는 다시 남산을 배경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 남겨두고 싶다.


다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꼭 언급 하고 싶다. 은희 못지않게 최악의 하루 보낸 료헤이가 멋진 목소리로 은희가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이라는 독백이 마지막 장면이다. 그의 마지막 말도 영화이기에 거짓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은희도 운철도 현오도 모두 료헤이가 쓴 소설 속 등장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영화 자체가 한 편의 소설처럼 느껴진다. 어떤 결론이든 보는 사람이 느끼는 것이 정답이다.


어쩌면 인생은 거짓을 말해야 하는 순간과 솔직해야 하는 순간과 그 둘을 고민하는 순간들로 대부분 채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순간에도 타인을 만나야만 하는 순간에도 내가 아닌 타인과 함께 있어야 하는 모든 순간이 대부분 그러하다. 거짓이어야만 유지되는 관계들과 솔직해서는 안 될 관계만 가득 찬 삶이 바라보는 별 바람에 스치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피도 엔드도 없는 세상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