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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 Jan 26. 2021

혐오스런 세상 버티는 방법에 대하여

마사 누스바움 '타인에 대한 연민'을 읽고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일찍부터 그것이 특권이었음을 깨달았다"


혐오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타인을 혐오하는 것을 멈추면 자기 자신을 혐오해야 하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혐오를 택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은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바보 같은 실수나 나태한 본능과 두려움에 벌벌 떨며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한 모든 순간에도 나는 나를 사랑하고 위로하려고 노력했다. 타인의 도움 없이 온전히 나의 건강함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사 누스바움에 이 현명하고 사려 깊고 따스한 책은 2021년에 고민이 많은 나에게 많은 위로와 위안과 사랑을 선물해줬다. 늦게라도 이 책을 만나 참 다행이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단 하루라도 혐오와 마주하지 않고 살기 어렵다. 인터넷이 너무나 발달했기 때문에 작은 혐오가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세상이 됐다. 사람들은 온갖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저주하고 폭로한다. 인터넷 세상 속에서는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 소속감을 느끼고 같은 편이 되고 적을 만든다. 그 롤러코스터 같은 혐오의 삶에 젖어들다 보면 혐오하지 않는 방법을 잃어버린다. 혐오하지 않는 자신을 견딜 수 없게 되고 자신의 삶을 점점 더 불행으로 내몬다. 우리나라는 충분히 행복한 사람들이 충분히 행복하지 않게 사는 나라가 됐다. 비단 이 문제는 대한민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마사 누스바움의 미국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의 전문가다. '혐오와 수치심', '정치적 감정', '혐오에서 인류애로', '분노와 용서' 등 저서들의 제목 만으로도 그가 어떤 주제에 천착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마사 누스바움의 '타인에 대한 연민'은 미국에 대한 현실과 혐오에 대해 파고든다. 혐오는 분노와도 다르고 차별과도 다르며 시기와 질투와도 다르다. 이 책을 읽고 혐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자질을 갖춘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를 탄생시킨다. 생산 수단은 제한돼있고, 그것을 분배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생산 수단을 가진 사람들은 시간을 통해 자산을 벌고 자신의 시간은 자신의 삶을 위해 사용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시간을 희생해 선택할 수 없는 삶을 버티어나간다. 자연스럽게 자본가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든 시스템 속에서 자산이 아닌 부채를 갚으면서 살아간다. 이 사이클을 자각하고 욕망을 억제하고, 공부하고, 시류를 읽어서 다시 태어나라고 하는 것이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류 의 재테크 서적들이 하는 말이다. 


혐오의 시작은 자본주의의 당연한 결과물인 '어려움과 불확실성'에서 시작된 두려움이다. 스마트 폰이든 티브이든 화면만 보면 노후에 대한 불확실성, 교통사고, 암 등 건강에 대한 불확실성, 밥벌이의 어려움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 두려움은 우파나 좌파나 마찬가지로 갖게 되며,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이 타자 화이다. 미디어와 언론과 자본가가 지정해준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자원과 부를 독점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특히나 이 두려움은 지독한 자기애적 감정으로 오로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이기적인 인간이 되면 타인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조차 잊게 된다.


두려움에 지배된 인간이 탄생하면 모든 불행한 사건을 특정인의 탓으로 돌리며 깊은 위안을 얻게 된다. 결과는 바뀌지 않지만 그들을 비난하면 무력감 대신 통제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인간이며 그들의 잘못된 행동만을 반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인이를 참혹하게 죽음으로 내 몬 양부모를 인간으로서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을 해내야 한다고 마사 누스바움은 주장한다. 


결과가 바뀌지 않는 것이 혐오에서는 중요하다. 혐오하는 대상은 혐오하는 대상으로 남겨 둬야 한다. 그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함께 일상을 공유하지 않고,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만든 이미지로 그들을 상상하고 더욱더 배제하고 무시하고 조롱한다. 다른 사람을 자신과 다르다고 구분 짓는 것이 혐오의 핵심이다. 여성 혐오에서도 그런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성이라고 구분 짓는 것처럼.


혐오만큼이나 유해한 감정은 바로 시기심이다. 시기심은 오직 소수만 좋은 삶을 누린다는 감정이다. 그래서 소유한 소수들의 기쁨을 망치고 싶어 한다. 시기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스스로 불행해진다. 질투와 시기심의 차이는 질투는 내가 소유한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반한 감정이고 시기심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소유한 사람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르다. 


시기심을 가진 이들은 소위 '트롤'로서 범죄의 영역을 넘나 든다. 최근 인기 직종으로 떠오른 BJ들이나 유튜버들에 대한 수많은 악플과 공격과 조롱과 비난만 봐도 시기심이 얼마나 유해한 감정인지 느낄 수 있다. 소위 '레커'라고 불리는 유튜버들이 흥하는 것 역시도 같은 맥락이다. 도를 넘은 폭로는 수많은 사람들의 밥줄을 끊었다.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면서 흥하게 된 유튜브는 이제 그 누구도 쉽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기 어렵게 됐다. 작은 실수는 사과해야 할 잘못이 되고 사과의 태도는 또 다른 논란의 시작점이 되고, 충분히 그들이 불행해졌다고 느낄 때까지 그들에 대한 린치는 계속된다. 그리고 또 다른 파괴 대상을 찾아 떠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21세기에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여성 혐오 부분이다. 마사는 트럼프가 한 여성 혐오적인 발언을 언급한다. 세계를 지배하는 대통령이 거침없는 언사는 참담의 수준을 너머 황당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법원은 2019년에 이어 또다시 리얼돌이 합법이라고 선언했다. 


마사는 성차별주의와 여성 혐오가 다르다고 말한다. 성차별주의는 여성이 집안일에 더 적합하게 만들어졌다는 수없이 반박된 수준 낮은 논리일 뿐이다. 그래서 이제 성차별주의를 주장하는 남자들은 드물다. 대신 그들은 여성 혐오를 선택했다. 여성 혐오는 여성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며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는 여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려는 것뿐이다. 여성 혐오는 남자들이 편하게 살아왔던 견고한 이해관계를 지키겠다는 지독한 결심이다. 여기에 더해서 월경, 출산, 섹스를 언급하지 못하게 하는 금기를 통해 그들을 억압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얼돌의 합법화 역시도 여성 혐오의 한 형태다. 여성을 오로지 구멍으로만 보게 만드는 조롱이기 때문이다. 리얼돌을 허용함으로써 보장되는 개인의 자유보다 그것으로 인해 침해되는 여성의 자유가 더욱 크다. 리얼돌을 이용하는 몇몇 남자들의 성욕이 수많은 여자들에 대한 모욕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제 합법화된 리얼돌이 끼칠 해악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대한민국 좌파를 대표하는 정당의 대표가 자기 당의 국회의원을 성추행하는 나라에서 여성 혐오는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들의 태도 역시 역겹고 여성 혐오의 표본이다. 대통령이 드러 내놓고 여성 혐오를 하지 않는다고 위안을 삼아도 될 정도 수준의 나라는 분명 아니다.


마사는 혐오와 시기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온전한 인간으로 누구든지 선을 행할 수 있고 또 변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행동과 행동하는 사람을 구분해야 하려는 노력이 보탬이 된다고 제안한다. 사실 이 해결책이 실제적으로 보탬이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철학자는 최상의 선과 감정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사람이다. 


마사의 해결책을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먼저다. 포기하면 모든 것은 멈춘다. 포기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은 더 어려워질 뿐이다.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사랑하는 사람과 노을을 바라보며 술 한잔을 나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p.s 혐오의 최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은 책을 읽고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고 있는 사람만 책을 읽고 또 반성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혐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부정적인 인간임을 포기 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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