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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 Mar 23. 2021

삶이라는 선택에 대하여

김연수 '일곱해의 마지막'을 읽고

"하얼빈에 소련군이 들어오자 백계러시아인들 중에는 자살자가 속출했다더군. 지금 생각하면 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선택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지 싶네.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니까. 죽음을 선택하는게 삶이라니까 이상하게 들리는가? 나는 조금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네. 삼수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모든 주머니를 다 털어 내게 남은 선택이 몇 개나 되는지 따져보고 있으니까."


백석의 시를 좋아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좋기 때문이다. '국수'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이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다 좋다. 어느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흰 바람벽이 있어'가 가장 좋다. 흰 벽을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대로 적은 시이다. 외로움에 술생각을 하다가 가족을 떠올리고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고 다시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스스로를 자위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된다. 지금 봐도 세련됐으며, 공감이 된다. 빈 벽을 스크린 삼아 추억과 공상을 하는 모습은 지금의 청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은 백석이 아닌 기행의 삶의 궤적을 쫓아가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광복 된 이후 북한으로 돌아가 체제라는 도마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기행의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낸다. 일찌감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문학지 편집장으로서 자유롭게 시를 발표하며 살았던 백석에게 있어서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시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다. 


고통 속에서 한국 문학의 기념비를 세운 백석은 스러져만 간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어떻게든 시를 쓰겠다는 그의 열망은 이제 살아남아야겠다는 욕구로 바뀌어간다. 기행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흰색처럼 옅어져만 가는 슬픈 과정이 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백석의 삶이 슬퍼진 것은 고향이 북한이었다는 것이고, 북한에서 삶을 선택해서 그의 남은 삶이 모두 진영 논리에 희생 됐다는 것이다.


불행은 행운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운은 한 순간의 선택으로 잔인하게 결과를 낳는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그 선택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어떤 선택은 한 사람의 일상을 제한하고 제한 된 일상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마모 되고 소멸 된다. 결국 소진 된 인간은 방향을 잃고 흘러가는대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적어놓으니 비관적인 것 같지만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며 먹고 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대부분은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백석 조차도 이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의 첫 문장에 적은 문장은 작가로서 삼수로 간 줄 알았던 기행이 사실은 축산반에 파견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서 합숙소가 아닌 사무실에서 혼자 잠을 자면서 친구에게 쓴 편지의 내용 중 일부이다. 그는 전달할 수 없는 편지를 쓰면서 하염없이 슬퍼했다. 그의 막막한 절망과 슬픔에 조금이나마 공감한 것은 내 감수성 때문일까. 꿈꿔왔던 것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여러 가지 조건들 속에서 스러지는 것을 느껴서 일까. 


백석도 나도 다른 선택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지만 괴롭고 힘들더라도 묵묵히 가던 길을 가는 것을 택했다. 백석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는 것을 긍정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밥줄을 붙잡기 위해 오지 않는 잠을 붙잡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본다. 


흰 바람 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러퍼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 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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