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슨'을 보고
** 이 리뷰에는 무지막지한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영화를 다 보시고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좋은 부모는 무엇일까. 부유한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이 좋은 부모일까.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 부모가 어떤 상황이든 자식을 키우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심리적 신체적 학대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 좋은 부모는 없다. 하지만 부유한 부모는 가난한 부모보다 조금 더 나은 부모가 될 수는 있다.
영화 '리슨'은 벨라(루치아 모니즈 분)는 포르투갈 출신의 극빈층 이민자로 남편 조타(루벤 가르시아 분)와 함께 영국 런던 교외에서 삼 남매를 키우며 살고 있다. 실직과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어느 날 청각장애아 딸의 학교에서 빚어진 오해로 양육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생기는 일을 그린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관객들이 끊임없이 부모를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청각 장애인 딸 루(메이지 슬라이 분)의 보청기가 고장이 나고 작고 예쁜 루의 등에는 멍이 들어있다. 조타는 아픈 큰 아들 디에고(제임스 펠너 분)를 깨워서 강제로 씻게 만들고 자신을 도우라고 몰아붙인다. 벨라도 조타가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다정해 보이는 조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면 관객들 역시도 의심을 거둘 수는 없다.
결국 루의 고장 난 보청기와 멍으로 인해서 학대를 의심받는 벨라와 조타의 집에 경찰과 복지국 직원들이 들이닥친다. 이들은 아무런 재판도 없이 벨라와 조타를 범죄자처럼 대하고 공권력을 이용해 아이들을 뺏어간다. 복지국 직원은 벨라와 조타에게 제대로 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아이들을 데려갈 뿐이다.
벨라와 조타는 아이를 뺏긴 뒤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영국 복지국은 벨라와 조타의 상황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입양시키면서 문제를 '처리'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영국의 복지는 벨라와 조타가 영국에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벨라와 조타의 아이들을 영국 사회에 강제로 이식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신히 벨라와 조타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지만 모국어는 물론 수어도 사용할 수 없다. 벨라는 루와 대화하기 위해서 수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복지국 직원들은 1시간이라는 짧은 접견 시간마저 벨라와 조타에게서 뺏어간다. 조타는 이런 상황에 처한 이민자들을 도와주는 앤(소피아 마일즈 분)을 만나게 된다. 앤은 복지국에서 도망친 디에고를 빼돌리고, 루를 다시 부모에게 돌려줄 수 있는 재판을 받도록 도와준다.
영화가 여기까지 오면 관객은 두 부류로 나뉜다. 영화에 완벽하게 몰입해서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에 분노하거나 아니면 끝까지 의심하며 영화의 반전을 기다리거나. 끝까지 의심하면 끝까지 실망하게 된다. 벨라와 조타 모두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부모였다. 루의 몸에 생긴 멍은 특이 체질 때문에 생긴 것으로 누군가의 폭력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입양을 기다리며 시설에 갇힌 아이들 역시 벨라와 조타를 그리워한다. 다혈질이고 가난한 외국인이 자녀에게 폭력을 휘둘렀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혐오라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남는 것은 진한 씁쓸함이다.
몸이 건강한 디에고와 막내는 입양이 결정됐지만, 청각 장애인인 루는 시설에 홀로 남게 된다. 그리고 벨라는 판사 앞에서 루를 되찾기 위해 감동적인 최후의 변론을 한다. 벨라는 자신들이 루를 잘 보살 필 수 있으며, 루는 수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외로운 상황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청각 장애인을 차별하는 영국 사람들의 태도를 꼬집는다. 그리고 벨라와 조타는 루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국가의 역할과 복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복지는 무관심에 가깝다. 정인이 사건만 봐도 학대나 방치에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국가와 공권력이 개입하는 순간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영국에서는 무관심하면 공무원들을 철저하게 징벌한다. 그렇기에 정해진 성과를 위해 공무원들을 잔혹하게 성실하다. 방치하는 것과 잔혹하게 성실한 것 중에 선택을 해야 한다면 방치를 선택하고 싶다. 키우거나 버리거나라는 선택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회의 끝에는 자유가 아니라 굴욕과 복종만 있을 뿐이다.
벨라와 조타 역시 복종 대신 자유를 선택한다. 두 사람은 아이들을 데리고 영국을 떠나 포르투갈로 돌아간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였던 벨라와 조타는 아이를 납치 유괴한 범죄자가 돼서 영국을 떠난다. 그마저도 막내 아이는 강제로 빼앗겨서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두 사람이 루와 떠난 복지국 시설의 문이다.
가족은 절대적이지 않다. 같이 살아서 행복하지 않다면 헤어지는 선택지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이 같이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절대적인 희생의 결과물이다. 그 희생은 부자이든 가난하든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