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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 Mar 29. 2022

사랑 무기력증에 대하여

왕가위의 '화양연화 리마스터'를 보고

**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영화를 보시고 감상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다가올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 선 후 떠난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알아챌 수 있을까. 영화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관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일까. 사랑에 빠지기 위해서 노력이 필요할까. 그 노력하는 모습이 사랑일까. 상대방이 싫지는 않지만 노력이 하기 싫어지는 순간이 사랑 무기력증이 아닐까.


'화양연화'는 1962년 홍콩의 한 아파트에 무역 회사 비서인 유부녀 소려진(장만옥 분)과 신문사의 편집 기자인 주모운(양조위 분)이 같은 날 이사를 하게 되면서 생기는 일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제목인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꽃과 같이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뜻하는 말이다. 


소려진과 주모운은 서로 남편과 아내가 있다. 소려진의 남편은 출장 때문에 바쁘고 주모운의 아내는 호텔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소려진과 주모운은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부딪치게 되고, 그 부딪힘은 기억이라는 흔적을 남긴다. 그렇게 친해진 두 사람은 밥을 먹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주모운은 소려진이 자신의 아내와 같은 핸드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소려진은 주모운이 자신의 남편과 같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우자가 서로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면죄부가 생긴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주모운은 소려진을 만나면서 창작 욕구가 불타서 무협소설까지 쓰게 된다. 소설을 쓴다는 핑계로 주모운은 소려진과 한 호텔 2046호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배우자가 불륜을 피운 피해자라는 공통점을 위로하면서 그렇게 가까워진다. 하지만 바람을 피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과 똑같이 되기 싫다는 양심을 가지고 애써 피한다.


하지만 사랑이란 그렇게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찰랑찰랑 위태로운 두 사람은 결국 쏟아지는 빗속에서 쓰러진다. 소려진도 주모운도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사람은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알았지만 두 사람은 한 번도 사랑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빠져든다. 별다른 말이 없어도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그저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육체적인 관계는 묘사되지 않는다.


'화양연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두 사람이 상황극을 하는 장면이다. 소려진은 주모운을 자신의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바람피운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을 한다. 주모운 역시 진지하게 남편처럼 대답을 해준다. 하지만 소려진은 주모운의 품에서 눈물을 흘린다. 가짜를 연기하다가 진짜 감정이 폭발하는 소려진의 모습이 참 귀엽다. 냉정한 연기를 하는 주모운에게 상처받은 것인지, 진짜 남편의 반응을 상상해서 우는 것인지 소려진의 감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미소가 지어진다. 잘 알지 못하지만 흐뭇한 순간이 있는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화양연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중경삼림'을 떠올렸다. 같은 감독의 영화이기도 하고 같은 배우가 등장하기도 하고 비슷한 시기에 두 영화를 봤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중경삼림'이 훨씬 더 좋았다. 감정이 투명하게 보이는 금성무나 페이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 표정만으로도 느껴지는 설렘이 좋았다. 통조림 대사나 울면서 달리는 장면의 솔직함이 직구로 다가와서 좋았다. 


'중경삼림'과 달리 '화양연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서 바라볼 뿐이다. 좋아한다 싫어한다는 감정 표현도 하지 않는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겉모습만 카메라에 담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을 화면에 담아내는 카메라 워크가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다.


다시 본 '화양연화'에서 두 사람의 멈칫거림과 애틋한 눈빛 그리고 수없이 삼키는 말들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그와 동시에 그 영화를 처음 봤던 대학교 시절이 나의 화양연화가 아니었을까. 어쩔 줄 모르는 감정들을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표현 보다 인내에 치우쳐진 과거의 내 모습이 그저 안쓰럽고 서글펐다. 나이 먹으면 자기 연민만 늘고 자기 연민에 빠지다 보면 극으로 치우친다는데, 그 전조증상인 건가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리고 다시 무기력해졌다. 사랑이든 삶이든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빛이 사라진 이후의 시간도 존재한다. 그게 인생이고 삶이다. 빛이 사라진 어둠이 대부분인 삶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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