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아 Feb 03. 2020

결국 같아지는 주어들에 대하여

'남산의 부장들'을 보고


같은 영화라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그 느낌은 달라진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 영향을 받고, 그 상황을 바꿔보려고 애쓰지 않는 연약하고 볼품없는 존재다. 그리고 대부분의 위대한 사람은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남산의 부장들'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 하게 된 과정을 그린 영화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정치인을 다루고 있는 만큼 정치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정치적인' 영화지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와 정치를 동일선상에 두고 두어서는 안된다. 영화와 정치가 한 몸이 되는 순간 그것을 선전물, 프로파간다라고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비겁하게' 둘을 엮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영화 시작에 픽션이라는 자막을 달고 마지막에 김재규의 육성 증언을 붙이는 것이 비겁한 시도의 대표적인 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실명을 쓰면서 전두환을 전두혁이라고 하는것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소송이 두려웠다면 김형욱처럼 아예 다른 이름을 사용했어야 했다. 끝까지 얄팍한 속셈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성민을 박정희 대통령과 닮아보이게 만들기 위해 분장을 한 것 역시도 얄팍하다. 시도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감독의 의도가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교훈을 감독은 배우지 못했다.


또 다시 영화가 아닌 감독이 붙인 자막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자막은 영화가 아니라 감독의 주관적 설명이다. 적어도 나는 감독이 관객에게 주입하려고 하는 사상까지도 영화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감독의 전작 '내부자들'의 대사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쉴 수 있었던 것은 허구의 기반을 둔 영화였기 때문이다. 허구라는 방패막이 있기 때문에 영화 속 대사들은 감독의 사상이 녹아있더라도 세련된 농담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감독은 영화 시작과 함께 박정희의 5·16 쿠데타를 설명하면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자막을 띄운다. 그 다음 문장에서는 쿠데타 세력이 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차지했다고 적었다. 영화가 끝나면 전두환의 얼굴이 사라지고 또 다시 자막이 떠오른다. 신군부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적혀있다. 이 영화는 군인→쿠데타 세력→신군부세력으로 바뀌었다고 소리친다.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막혀 있는 영화는 재미없는 것이 당연하다. 감독의 의도에 공감한다면 흥미진진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지루하고 졸릴 수밖에 없다. 물론 나는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봤다. 영화가 좋거나 재미있어서는 아니다. 영화와 상관없이 감독의 의도에 동의 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연기, 감독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 편집의 호흡, 미술의 정교함 등 이 영화는 잘 만든 영화다. 특히나 후반부 15분의 이병헌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이라는 편견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