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하지 않을 시간

반응하지 않고 그 끝까지 걷는 것

by 루나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해결되지 않아도 좋다. 잠시 휴전의 시간처럼 패배한 듯이 걷고 있는 것 같지만. 감정의 결도 달라지고 주변의 풍경과 놓이는 상황이 혼란을 잠재운다. 그래서 감정이란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다. 비 오는 날 차 한 잔 음미하듯 흘려보낸다. 보낸다. 기꺼이. 숨이 차올라 헉헉 대면서도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 10km를 뛰지만 완주하다 보니 제법 멀리까지 뛴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뛰고 있는 내 모습.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주말의 황금 같은 시간을 뒤로하고 나와의 도전에 기꺼이 깃발을 들고 모인다. 운동복부터 운동화까지 각자 천차만별이다.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그 신호소리에 다 같이 경주를 시작한다. 달리는 모습도 제각각이다. 나는 걷는 속도일지언정 뛰려고 안간힘을 쓴다.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뛸 때마다 가파오르는 호흡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얼마나 달리겠어하면서도 벌써 다섯 번 넘게 마라톤을 뛴다. 멈추려고 하면 쉽다. 하지만 끝에서 밀려오는 패배감에 젖어 하루를 시작하기 싫어서인지. 단순한 승부욕인지. 뛰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쟁심인지. 죽도록 뛴다. 마지막 남은 2.5km 지점에 물을 담은 종이컵들이 나를 반긴다. 그러면 이제 살았다. 남은 거리도 쉽진 않지만 엎치락뒤치락 사람들 사이에 껴서 가긴 한다. 마침내 결승선이 보이면 내 안에 꿈틀대전 표효 같은 게 솟구친다. 불타는 듯 얼굴색이 붉다 못해 아파 보인다. 하지만 웃는다. 왜 웃는지 모르겠지만, 골인했을 때 이런 기분일까. 공 대신 내 몸을 던져 이겨낸 기분이다. 메달과 간식을 받아 들고선 찢어질 듯 아픈 허벅지를 끌고 어딘가에 주섬주섬 앉는다. 물을 마시고 달달한 간식을 한 입 베어 물면서, ‘돈 주고 고생하고 기뻐하는 모습이란 참’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대견하고 멋진 일을 한 것 같다. 메달을 보며 땀을 닦는다. 직장에서는 마라톤 한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놀란다. 어떻게 그 거리를 뛰냐고. 하프까지 뛰지도 못하지만. 그것도 대단한 것이라고 하면 뜻 모를 성취감이 밀려온다. 돈을 내고 접수를 하고 배번호를 받으면 준비를 하곤 했다. 연습을 많이 못하고 나가긴 하지만 뛸 때의 그 긴장감. 그리고 뛰면서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그 시간. 큰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내 운동 취미 중 하나이다. 수상스포츠를 좋아하지만 격변하는 몸을 보며 물가로 잘 나가지 않게 된다. 남편 또한 가지 않는 편이어서 수동적으로. 자의적으로 안 하게 된 취미 중 하나이다. 취미 부자라는 말도 있고 뭔가를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삶의 문제에 부딪히면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겠는 미지의 영역에 던져놓고 나면. 무거운 일들에 삶이 짓눌리는 것이 싫었다. 나의 시간을 어두움에 매몰되어 살아가지 않아도 돼서 좋기도 하다. 한숨 자거나. 보류. 우선 보류. 결국 패배는 아닌 것이다. 지면 어떠한가. 나이가 들어가니 새삼 변하는 내 모습에 웃참이지만. 나만 아는 민망함이니 괜찮다. 그런 것에 우쭐하거나 눈치 볼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뛰는 중간에 엎어질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지만 다시 뛴다. 포기하고 싶은데. 왜 다시 일어서는지 모르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게 마라톤이다. 그래서 뛰나 보다. 지속과 견딤의 연속이기에 힘든가 보다. 중간에 길을 틀 수도 있는데 절대 안 된다고. 나 혼자 외치며 가는 이 스포츠가 내겐 매력 있다. 나를 뒤흔들었던 감정들. 애매한 반응들로 미혹하는 사람들. 힘드니까 안 해버렸던 중요한 것들. 수 없이 나의 고요한 시간을 흔드는 것으로부터 반응하지 않을 시간. 그 고귀한 시간을 내게 선물한다. 그 고귀한 시간 동안 힘든 육체가 소리 질러도. 호흡이 얕아져도 사람들이 멀어져 가도. 그런 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하는 순간 경주를 지속할 힘을 잃게 된다. 계속 가면 결승선이 보인다. 그 선을 나도 볼 것이다. 인생이 그렇듯이. 마라톤의 2.5km 지점마다 물도 마시고 바나나도 먹고 초코파이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뛴다. 두렵게 하는 일들이 커 보였지만. 반응하지 않아도 결승선에 가는 나를 발견한다. 고요하고 외로운 이 시간. 묵묵히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듯 그렇게 나의 시간을 견딘다. 나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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