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일기를 쓰다가 수필을 써보고 시도 써본다. 글을 쓰는 것이 처음에는 좋았고 잘 쓴다는 소리를 들으니 또 쓰고 싶어진다.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글로 유명해지고 싶은 속세의 마음이 든다. 하지만 글만 써서 부자가 되거나 명예를 얻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글을 쓰는 마음에 욕심이 섞이자 힘이 들어가고 한 문장도 쓰이지 않는다. 그래도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쓰지 않는 나는 쓰는 나와 한 몸이지만 영혼의 무게는 다르다. 나로 존재하지만 조금 다른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꿈에 대한 꿈은 악상을 떠올리려고 애쓰는 작곡가의 마음처럼 한 단어, 한 문장, 하나의 착상이라도 얻어내는 것이다. 긴 잠에서 깨어나 어떤 글감이 떠오르면 홀린 듯이 음표를 그리듯 키보드를 두드린다. 손가락 끝은 온 우주의 에너지가 모인 듯 생동감이 넘치고 자판과 자판 사이를 춤을 추듯 움직인다. 마지막 글자를 입력한 후에 쓰는 존재인 내 영혼은 감미로워지고 마침내 생기를 띤다.
글을 써서 유명한 작가가 되지 못했다. 돈도 벌지 못하고 명예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언제나 내가 글을 잘 쓴다고 한다. 오늘은 아빠가 내가 쓴 글을 보내달라고 메일 주소를 카톡으로 보내셨다. 뜬금없는 주문에 나는 어떤 글을 보내달라는 거냐고 물었다. 아빠는 대답하셨다. "울 딸이 쓴 글이면 아무글이나..ㅎ"
우리 딸이 쓴 글이면 아무 글이라도 읽어보고 싶다는 뜻이다. 노벨문학상을 받거나 서점의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전시된 글이 아니라도 괜찮다는 말이다. 이토록 맹목적인 독자를 확보하는 일은 무명작가(쓰는 사람은 작가라 칭한다면)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독자가 가족이라도 말이다. 때로는 가족이라서 할 수 없는 말이 더 많다.
나는 오늘도 쓴다. 쓰지 않아도 하루는 그럭저럭 흘러가고 일주일, 한 달, 일 년, 그리고 나의 생애가 다할 때까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쓰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살지 못하는 존재다. 호흡기관과 소화기관은 작동하겠지만 생기와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없다. 맹목적인 독자 말고도 글 자체로 인지도를 얻고 싶은 욕망이 차오른다.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가 말한 "텅 빈"욕망이다. 글을 쓰는 것 그 자체로 나는 충분히 좋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