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인간은 늘 언어를 창조한다.
나도 '그럴 듯한' 말을 찾아보려고 '비교하다'라는 말의 라틴어를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 말을 만들어보았다.
[고전:아이퀴파로]
타동사
1 같게 하다, 같은 수준으로 만들다; 비교하다.
2 〔자동사적 의미로〕 ···와 같이 되다, 수준에 도달하다, 필적하다
이런 단어가 있다면(내가 갓 지은 단어지만) 한국인은 아마 호모 아이퀴파로의 직계 후손이 아닐까.
우리는 비교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비교와 경쟁 그리고 서열.
이 세 가지 키워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다.
다른 나라도 그럴지도.
(다른 나라는 안 살아 봐서 모른다.)
그 세 가지 키워드 속에서 우리는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지지고 볶고, 행과 불행, 온탕과 냉탕을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다음은 최근에 읽은 동시다.
궁금증
권오삼
우리 엄마는 내 동무네 집이
빨간 벽돌로 지은 집에 창가에는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고...하면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하지만
얼마짜리 집이래요 하면 그만
아,그래!하고 놀란다
다른 집 엄마도 그럴까?
우리는 궁금해한다.
얼마 짜리 집에 사는지, 얼마 짜리 차를 타는지, 얼마 짜라 가방을 메는지
관심분야가 아니어서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궁금증은 은유이다.
한국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은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이 내재되어 있다.
타인과 비교해서 더 아름답고, 더 부유하며, 더 뛰어나야 주목받는다.
그 주목의 이면에는 드러내지 않는 질투도 섞여있다.
공인을 대할 때는 이 질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성적 비교라는 성에 살고 있었다.
시험마다 전교 몇등을 하는지가 나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나는 비교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전투의지 상실. 백기를 든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아무리 애써도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몇 트럭씩 존재한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뛰는 놈 위에는 늘 나는 놈이 있다.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엄마는 자식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많다.
성실해라, 공부해라, 사랑해라 등...
하지만 결국에 전하는 말은
너의 삶을 살으라는 것.
나도 이런 자세로 아이를 키우고
이런 자세로 남은 생을 살고 싶다.
비교와 경쟁의 굴레에서 내 마음대로 홀로 자유롭기는 정말 어렵겠지만
최소한 그 마음만은 가지려고 한다.
비교를 통해 얻어낼 만족과 행복은 황금사과가 열리는 나무와 같다.
호모 아이퀴파로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