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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토끼 Dec 26. 2016

#11 입장차이

감정의 공유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어서 의식하지 않아도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그 감정은 알아채지 않아도 기어코 무의식에라도 남아 내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존재를 드러낸다.     

어느 책에서 보니 '화'라는 것이 결국엔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란다. 사람은 누구나 나르시즘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고 내 입장에서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욱하는 성격을 온 가족들이 인정하는 나는 배려심 많고 섬세한 남자친구와는 다툴 일이 거의 없는 편이다. 커플들마다 사정이 있고 다툼의 주제도 다르겠지만 우리가 잘 싸우지 않는 것은 남자친구 덕분이다. 그는 나에게 쌓인 불만을 시간이 지나서 표현한 적이 없고, 언제나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자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요즘 두드러진 그의 단점은 내게 너무 의지하는 것. 게다가 그는 최근 몇 달간 이직한 곳에서 일이 너무 힘든 상황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고 때론 극단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 그가 한동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너 말고는 삶에 낙이 없어.” 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 같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반복된 이 말로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일상을 소중히 하지 않는지,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돌보지 않는지, 직장 스트레스로 얼마만큼 불행한지 등 너무 깊이 생각해버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해도 그가 겪는 불행의 탈출구는 마치 나 하나밖에 없다는 듯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느 정도로 챙겨주고 배려해야하는지 가늠할 수 없게 했다.    

나는 각각의 독립된 남녀가 만나 행복하고 즐거운 일상을 쌓으며 사랑을 하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본다. 영화나 TV에서 주소재로 다루는 운명적이며 강력한 사랑은 무언가 결핍된 사람끼리 만나 시너지를 이룬다. 그러나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극단적인 경우로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백야행을 예로 들 수 있다.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사랑의 필요조건이 불행이 아닐 수 있다고 믿었다. 한때 가장 좋아했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짤막하게 남긴 글에는 사랑은 즐거운 것이라고 했다. 사랑으로 힘들어하고 아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20대 초반의 연애가 떠오른다. 당시 만났던 남자친구는 힘든 가정환경을 가진 친구였다. 파산한 아버지 대신 엄마가 밤에 식당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상하게도 그 아이는 세상 많은 것들에 불신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친구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꾸며내는 모습으로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 그 아이는 마치 내가 없으면 자신의 삶이 무너질 듯한 발언을 일삼았다. 또한 지나친 간섭과 행동도 있었다. 사랑이 다하고도 그 아이를 책임감으로 대했던, 어딘가에 메여있던 내가 생생히 기억난다. 자꾸만 스스로에게 의무를 강요했던 것 같다. 

다시는 그런 마음을 갖고 싶지 않았는지 혹은 트라우마 같은 것이었는지 현재 남자친구에게 참아왔던 마음이 터져버렸다. 무심코 했던 말들이 내 마음에 찌꺼기를 쌓았다고. 이유 없이 글이 읽히지 않았고 써지지 않은 게 그런 이유였던 같다고 말이다.    

다시는 극단적인 말들을 내게 쏟아놓지 말라고 덧붙였다. 나는 너의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니라고. 사실 보이지 않던 오해가 있었다. 표현이 서툰 남자친구는 단순히 위로받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 내게는 모든 말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 문제였다.    

결론은,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해했다. 나는 욱했다. 내 입장만 생각했고 흥분해서 쏘아붙였다. 남자친구 출장 전날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공항으로 가야하는 그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했다.     

냉정히 생각하면 단순히 입장차이일 뿐이다. 그의 언어를 내 방식으로 해석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고 부담을 담아두는 것은 나 자신이었으니까.    

그러나 입장차이인 것을 감안해도 전처럼 마음이 홀가분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그는 바쁘고 힘들고 내가 어쩔 수 없이 영향 받을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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