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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토끼 Mar 22. 2017

#18 시민의식과 엉킨 과거

-무언의 폭력은 어디에든 존재한다

다이어트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눈을 뜨자마자 엄마와 걷기 운동을 위해 밖을 나섰다. 내가 사는 지역의 긴 천을 따라 걷는 왕복 2시간 코스. 예상 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조깅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공복이라 힘이 나지 않아 적당한 속도로 걷고 있는데 순간 누군가 내 등과 어깨를 세게 밀치고 지나갔다. 예상치 않던 공격이라도 받은 듯 당황스러웠고 금세 기분이 다운됐다. 뒤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조금만 옆으로 지나갔으면 될 일인데...

"이따가 만나면 아까 나 치고 지나갔다고 말해야지."

내 말에 엄마는 바로 반박했다.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나이 많은 사람을 네가 이길 거야? 애초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으면 그냥 저러고 지나가지도 않았어. 너는 애가 성격이... 꼭 그렇더라."

내가 바랐던 것은 웃는 얼굴로 말해주며 사과를 받기 위함이었고 그런 그림을 원했다. 그 사람에게 복수심에 타올라 화를 풀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엄마 말에 더욱 억울한 처지가 되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급속도로 내 마음 깊은 우울한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피해자 아니야?'하는 생각에 엄마 때문에 속상했던 어렸을 때 과거까지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 살던 곳은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였다. 아이들이 많은 곳.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성추행을 몇 번 당한 적이 있다. 아홉 살 때였나, 친구 집 아파트 계단을 오르다 웬 낯선 아저씨에게 잡혀 억지로 입술을 부비게 된 일이 있다. 어쩌다 생긴 상황일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울지도 못했다. 모르는 아저씨인데, 나는 어린 시절 조금은 멍한 아이였고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는 하질 못했다. 이어서 친구도 계단을 내려오다 당했는데 그 아인 바로 싫은 티를 냈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이를 닦으라고 언성을 높였다. 한 번 닦고 두 번 닦고 세 번 닦고 검사도 받았다. 이후 난 그 낯선 이에게 한 번 더 당하게 되었고, 친구에게도 모르는 아저씨가 다가와 우리에게 한 일을 비밀로 하자고 말했다. 죄책감이었을 게다. 그러나 크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음을, 엄마의 대처가 적절치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필요한 마음의 짐의 흔적은 아직 남았는데.

피해자를 더 큰 피해자로 만드는 일- 엄마가 그랬다. 엄마가 만약 그 때 그런 아저씨가 있다고 동네에 알렸으면, 내가 괜찮다고 해도 마음에 후유증이 남을 것을 걱정해줬으면 어릴 때부터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일이 적었을 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스스로 지키는 것이라 깨달아버렸다.

무언의 폭력은 언제든 다가오니까.

그래서 그랬다. 남이 나를 억울하게 만드는 상황을 허용하다보면 결국 나를 지킬 수 없게 된다. 사소한 것이라도 옳은 것을 옳다 말할 권리는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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