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년 전 독일 유학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대학 입학 허가서(Zulassung)를 손에 쥐고 루프트한자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홀로 도착했다. 비행기 표를 자랑스럽게 들고 씩씩하게 인천공항에서 가족들을 뒤로 한지 약 13시간 만이었다. 내 앞에는 작고 길쭉하고 마른 한국 사람들이 아닌 크고 몸집 있는 외국 사람들이 이리저리 서있었다. 짐을 찾으며 낯설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앞에 펼쳐진 처음 유럽땅을 밟은 풍경들을 눈에 담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금발 혹은 짙은 갈색에 파란 눈들, 그리고 규모 있는 몸집을 한 사람들이 두 세 사람씩 모여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낯선 풍경들을 보며 짐을 찾고 모레 있을 어학 시험에 대비해 하이델베르크의 한 청소년 모텔(Jugendliches Hous)로 향하려고 차편을 찾았다.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하이델베르크행 공항버스를 찾아냈고 표를 끊었다. 내 앞에는 공항에서 찾은 이민가방에 한가득 넣어 온 무거운 옷과 책들을 포함한 짐이 있었고 이를 끌고 공항버스를 찾아 짐을 실은 뒤 올라탔다.
여러 국적의 외국인들이 섞여있었던 비행기 안과는 달리 버스 안에는 대부분 독일인들이 탑승해 소곤소곤하는 대화 풍경이 있었다. 창가의 한 자리를 잡아 앉았고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외국 청년이 탑승했고 내 옆의 빈자리 앞에 다가왔다.
"옆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Darf ich mich hier neben Sie setzen?)”
정중히 물었고 나는 “네, 그럼요.(Ja, gerne.)” 대답했다.
“감사합니다!(Danke!)”
하고 그 외국 청년은 자신의 가방을 윗 짐칸에 올려놓은 뒤 자리에 앉았다.
그 외국인은 자신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화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에 있는 스페인에서 온 학생이라고 소개하였고 자연스럽게 나의 소개도 이어졌다. 바로 같은 대학교에 입학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같은 학교 학생을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2002 월드컵’을 치른 나라예요.”
나는 자랑스럽게 소개하였다. 남성으로서 어깨까지 드리운 긴 금발을 한데 묶은 그 학생은 그러냐고 하면서 놀라워하였다. 우리는 곧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짓궂게도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나라가 스페인을 이겼어요.(Korea hat Spanien gewonnen.)”
“네, 안타깝게도.(Ja, Schade.)”
“안타까운 게 아니라 좋은 일이지요. (Es ist kein shlechtes ding, sondern gutes ding.)”
그 스페인 학생은 Ja(네), Ja(네) 하며 겸연쩍게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물고를 튼 우리의 대화는 자신의 나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생활 등에 대한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화를 하는데 어느덧 차창밖은 어두워졌고 얼마 안 가 하이델베르크의 한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완전히 낯선 곳에 큰 이민가방과 함께 덩그러니 놓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청소년 모텔에 찾아가야 하는데 내손엔 지도 한 장이 들려있긴 하지만 어떻게 버스를 타야 할지 또는 어떻게 택시를 잡아타야 할지를 몰랐다. 함께 내린 그 학생은 나에게 어디로 가냐고 물었고 나는 목적지인 모텔 이름을 말해주었다. 학생은 버스를 타고 어떻게 어떻게 가면 된다고 설명해 주었는데 외국에서 더구나 어두워진 시각에 낯선 곳을 찾아가기가 너무 막막하게 느껴졌다. 내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과 또 내가 끌고 가야 할 커다란 이민가방을 보고는 학생은 잠시 생각하더니 같이 가자고 하였다. 큰 짐을 끌고 독일에 처음 온 한국 여자애가 자신이 생각해도 막막해 보였던지 알려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학생은 곧 택시를 잡았고 무거운 짐을 들어 올려 차에 싣고 우리는 함께 택시를 탔다. 약 20분즘 지나서 ‘청소년 모텔’의 간판이 보였고 도착하였다. 택시에서 짐을 내리고 그 스페인 학생은 자신이 운임을 지불하였고 그 크고 무거운 나의 이민 가방을 모텔 입구까지 약 30m의 거리를 자신의 가방은 내게 맡긴 채 들고 혹은 끌며 운반해주었다. 내 큰 짐을 들어 땀을 흘리며 끙끙거리며 운반하는 학생이 고맙기도 했지만 미안하기도 했다. 학생은 내 짐을 모텔 카운터 앞까지 옮겨놓고는 내가 숙소를 체크인하는 과정까지 무사히 잘하는지 지켜보아주었다.
우리는 아쉬운 작별을 하며 그 학생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내 손에 자신이 세 들어 있는 집 전화번호를 쥐어주고 갔다. 유럽 독일 땅에 온 첫날 한 첫 유럽인과의 따뜻한 만남이었다.
그날 저녁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하이델베르크의 숙소에 오기까지 얼마나 긴장했는지 옷이 땀에 흥건히 젖어 샤워를 하며 손빨래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긴장은 했지만 그 낯섦을 동행했던 스페인 학생의 따뜻한 마음을 오롯이 안음으로 달래었다.
그렇게 독일에서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틀 후 있었던 어학 시험에는 한국에서 미리 독학하며 준비한 덕에 합격할 수 있었고 별도의 어학과정 없이 나는 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이 소식을 먼저는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알렸고 또 나는 나를 도와주었던 그 스페인 학생에게도 전화로 알려주었다. 학생은 축하한다며 여러 가지 타국에서 온 신입생이 해야 할 일들과 필요한 일들을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어디에 가면 학생 무료 대중교통 이용권을 받을 수 있다, 어디에 가면 방을 구할 수 있는 광고를 찾을 수 있다, 어디에 가면 이러이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등등. 비싼 수업료와 생활비를 고민해야 하는 우리나라의 대학생들의 경우와 다르게 독일은 정말 복지국가답게 대학생도 수업료가 무료이고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본 수업이 확정되니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방을 구하는 것이었다.
“방 구할 때 엄청 고생할 수 있어. 많이 돌아다녀야 하고 집주인도 잘 만나야 돼. 나는 방 구하면서 많이 울기도 했어.”
나는 그 학생이 알려준 대로 학생 복지과에 찾아가 방 구하는 절차를 알아보았다. 복지과 앞에는 하이델베르크 시민들이 학생들을 위해 내놓은 방 광고지와 전화번호들이 빼곡했는데 나는 이틀을 복지과 앞에 서성인 끝에 한 적합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학생은 좋은 집을 빨리 찾게 되어 다행이라며 매우 기뻐했다. 나는 학생의 도움으로 외국인 신입생이 필요한 일들 이것저것을 비교적 손쉽게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일들을 다 해내기까지 그 학생의 얼굴을 다시 보지는 못했고 통화만 했었다.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통화로 이것저것 알아보고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학생을 만나 감사의 의미로 식사라도 사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고 통화를 시도했으나 웬일인지 나의 독일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쭈뼛쭈뼛하다가 말을 잘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색하게 말을 하다가 그만 수화기를 놓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내가 그렇게 수줍어하고 용기 있게 말을 못 했는지 매우 안타까울 지경이다.
지금이라도 그 학생을 만날 수 있으면 좋은 식사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낯선 유럽땅에서의 따뜻한 첫 유럽인의 좋은 인상을 남겨 준 스페인 학생. 지금까지 독일 유학에서의 좋은 기억으로 남아 나의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