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에 널린 게 꽃인데
"사장님, 이 장미꽃은 얼마예요?"
"그건 수입 장미라서 한 단에 5만 원 해요......"
'네?'
'네에...'
육지에 살 때는 꽃 도매시장에 가서 꽃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간혹 그 자리에서 꽃바구니를 만드는 곳을 지나면 코 끝에 닿는 그 풋풋한 풀 냄새가 좋고, 여러 가지 종류의 꽃을 골라 커다란 신문지 다발을 안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 '아, 좋겠다.' 하며 부러워하기도 했지요. 모두 예뻐 어떤 꽃을 사야할 지 몰라 도매시장을 두세 바퀴 돌아본 뒤에야 고심 끝에 고른 '우리 집으로 가자' 꽃을 데리고 집으로 갔어요.
한 종류의 꽃을 꽃병에 꽂아도 집 안의 분위기는 사랑스럽지만 욕심 많은 꽃순이가 어째 한 종류만 골라올 수 있겠어요? 허리 둘레만큼 서너 종류의 꽃을 사와서는 물 올림부터 합니다. 가급적 '편하게 살자!' 주의인 제가 하는 물 올림 방법은 신문지 포장 그대로 꽃병에 꽂아 반나절 이상 그대로 둡니다. 그리고 꽃들이 생기를 찾으면 화병 길에에 맞게 줄기를 자르고, 잎을 정리해서 마음에 드는 화병에 꽂아둡니다.
꽃은 혼자 볼때보다 함께 볼 때 더 예쁩니다. 그래서 옆 동에 사는 언니, 8층에 사는 언니, 길 건너 아파트에 사는 언니네까지 꽃배달을 갑니다. 이렇게 나누다보면 우리 집 화병은 한 줌 만큼의 꽃만 남게 되지만 꽃이 주는 기쁨은 여전히 똑같습니다. 또 꽃을 보고 기뻐하는 언니들의 얼굴을 보니 아이의 엄마도, 아줌마도 아니고 이 순간만큼은 소녀가 된 것 같아요.
제주에서는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어 식탁에 꽃이 없어도 허전한 줄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꽃이 그리워집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동백꽃, 벚꽃, 수국, 마당에 핀 민들레와 허브의 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물을 먹고 자란 꽃이 보고 싶어 집니다. 제주는 참 아름답지만 가끔은 대도시의 매연과 소음이 그리운 것처럼 꽃집에서 산 꽃이 보고 싶어 집니다.
오랜만에 제주시 산골이 동네를 벗어나 신시가지로 나갔습니다. 운전을 하다 <꽃 직판, 도매>라는 글씨를 보고 우선 차를 멈췄어요. 그곳은 커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얼마만의 꽃 도매 시장 나들이인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더라고요. 주차를 하고 도매시장이라고 적힌 가게의 문을 열었습니다. 다양한 꽃들이 있었어요. 오늘은 장미가 사고 싶은 날입니다. 사장님을 따라 따로 관리되는 저온저장고로 들어갔습니다. 형형색색의 장미들의 여러 종류가 있었어요. 이곳의 장미들은 모두 수입 장미라고 합니다.
"사장님, 이 장미꽃은 얼마예요?"
"그건 수입 장미라서 한 단에 5만 원 해요."
'네?'
'네에...'
운송료가 있으니 육지보다는 비쌀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했던 가격을 훨씬 넘어선 대답에 지갑마저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한 단에 5만 원이라는, 그것도 도매가인 충격적인 장미 가격에 지갑을 닫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손길로 자란 장미꽃이 아른거려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요. 결국 그날 내내 폭풍 검색을 했고, 집에서는 멀지만 한림에 있는 꽃 농장에서 도매로 꽃을 팔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야호! 집에서는 50분 걸리지만 괜찮아요. 5만 원을 아낄 수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었죠.
거베라가 참 예쁘죠? 두 가지 색의 거베라를 한 단씩, 향이 매력적인 유칼립투스 가지 세 단, 제가 가장 사랑하는 꽃인 알스트로메리아 한 단, 불새를 닮은 글로리오사 한 단까지 무려 일곱 단을 49,000원에 사 왔어요. 이번에도 물 올림을 한 후 유칼립투스 나뭇가지 두 단과 거베라 한 단만 가지고 나머지는 하귀와 노형에 사는 언니들과 나누었어요.
하귀에 사는 언니는 정원에 있는 유칼립투스를 가지치기해서 나눠주었어요. 언니의 넉넉한 마음을 닮은 둥근 보름달 모양의 잎이 참 귀여운 품종이죠? 꽃은 주는 기쁨과 받는 기쁨을 모두 가진 복 받은 존재가 분명해요. 아쉽게도 꽃병에서는 잠시 머물다 시들지만 말이죠.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 만족하고 감사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 같아요.
다시 사랑스러운 화병이 완성되었어요. 어느 꽃 농부의 손길을 거쳐 우리 집으로 온 거베라와 이웃 언니의 작은 화분에서 시작해 정원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낸 유칼립투스, 꽃을 산 도매 농장 사장님께서 직접 기른 글로리오사 한 가지까지 꽃마다 그들의 이야기를 간직하며 화병에 모여 있지요. 식구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식탁에 자리를 잡으면 꽃이 주는 기쁨을 즐기기에 충분해요.
강렬한 붉은색의 글로리오사의 꽃말은 '영광'이라고 해요. 딱 한 송이가 피어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한 송이가 더 피었더라고요. 마치 "간밤에 잘 잤어? 좋은 아침이야!" 반갑게 인사해 주는 존재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 드네요. 오늘은 글과 사진으로 꽃이 주는 기쁨을 함께 나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