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순간
"첫째야, 와서 흰머리 좀 뽑아봐."
거실 한복판에 엎드려 눕고는 첫째를 긴박하게 불렀다. 클렌징을 하려고 거울을 봤다가 반짝이는 흰 머리카락 한 가닥을 본 것이 잘 준비를 하는 첫째를 거실로 다시 나오라고 한 이유였다. 하루가 끝나는가 싶던 집이 갑자기 다시 분주해졌다. 나에게 흰머리카락이라니!
첫째가 알뜰살뜰 꼼꼼하게 잘 살필 수 있도록, 두피를 왼쪽부터 세 구역으로 나눠주고 1번 구역부터 보라고 했다. 얼핏 보니 그 구역에 흰머리카락이 세 가닥이나 있었다고 귀띔을 하며.
첫째는 1번 구역에서 2개를 채집하고, 2번 구역으로 옮겨갔다. 우리 집 막내는 뽑혀 나오는 흰 머리카락을 보더니 엄마가 '늙어가는' 것 같아 갑자기 걱정이 되었나 보다.
"엄마, 나는 다리를 주무를게요."
흰머리카락은 첫째가 뽑고, 부은 다리는 막내가 손으로 조물조물 만져주고 거실 바닥에 천국 카펫이라도 깔린 기분이 든다. 작년 가을부터 흰 머리카락을 발견할 때마다 급격히 늙어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은 흰머리카락을 뽑다 말고 갑자기 때아닌 호사를 누리고 있다.
"흰머리카락은 하나에 100원!"
호사를 깨우는 첫째의 현실적인 한 마디가 귀를 강타했다. 요즘 좀 컸다고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첫째와는 대화를 하는 재미가 있다.
"네가 말을 안 들어서 생겼는데, 내가 왜 돈을 주니? 내가 받아야 되거든."
첫째가 대꾸 없이 웃는다. 아마도 '말을 안 들어서' 생긴다는 흰 머리카락의 숫자가 예상치를 훨씬 웃돌자 당황한 모양이다. 흰 머리카락이 다섯, 여섯, 일곱 가닥을 넘어서니 둘째가 열정을 더해준다.
"엄마, 축구하다가 발톱 빠진 발가락 아파?"
주물러도 되냐고 묻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발톱 빠진 자리를 얼마나 꾹꾹 누르는지!
"아파? 엄마 아파?" 너무 아팠지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 일고 여덟 살 쯤의 어느 주말 오후가 생각이 난다. 우리 아빠는 머리가 아주 새까맣다. 지금은 흰 머리카락이 좀 생겼지만 예순이 넘도록 아주 선명한 검정 머리카락을 유지하셨다. 그래서 새치가 생기면 워낙 눈에 잘 띄는 탓에 가끔 나에게 족집게를 주며 흰머리카락을 뽑아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때 아빠는 지금의 나처럼 거실 바닥에 엎드려 누웠고, 나는 지금의 첫째처럼 아빠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살피며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흰머리카락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우리 아빠가 벌써 할아버지가 되는 줄 알고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아빠가 할아버지가 되는 데는 그날 이후로도 20년은 더 걸렸다. 문득 옛날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아빠의 그때보다 지금의 내가 더 늙어서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지금쯤 아빠는 의문의 1패를 당한 줄도 모르고 주무시고 계실 것이다.
오늘 나는 흰 머리카락 11개와 어쩔 수 없는 이별을 했다. 이토록 마음이 가볍고, 미련이 없는 이별이라니! 오히려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아이들이 준 행복한 기억은 토끼풀밭에서 네잎클로버를 찾았을 때보다 더 큰 행복을 안겨주었다. 가끔 흰머리카락을 환영해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