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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14. 2023

저녁 밥상은 분업과 협업의 결과

배민과 헤어질 결심

  월요일은 돼지 불고기, 화요일은 삼겹살 구이, 수요일은 한우 등심구이, 목요일은 월요일에 먹고 남은 돼지 불고기에 채 썬 양파와 당근을 추가하고 고추장 양념을 더해 만든 돼지고기 제육덮밥, 금요일에는 화요일에 남겨 둔 삼겹살 한 줄을 굽고 통마늘을 넣어 간장에 조린 삼겹살 간장 조림.


  8시에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짜낸 우리 집 저녁 식사 메뉴입니다. 보통의 저녁 식사 시간은 이미 넘겼기 때문에 조리 시간이 짧고 간단한 음식(이라기에는 부족한 조리법)으로 식사를 준비하지요.


  1. 프라이팬을 꺼내 가스레인지 삼발이 위에 올려놓는다.

  2. 가스불을 켠다.

  3. 고기를 뒤집어 가며 굽는다.

  4.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릇에 담는다.


  글로 적으니 길이만 길지, 실제로는 '굽는다' 세 글자만으로도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통하는 레시피입니다. 어쨌든 이 짧은 요리를 하는데도 어찌나 손이 바쁜지! 게다가 빈 밥솥을 두고 출근을 한 날에는 퇴근 후에는 쌀부터 씻어 밥을 안쳐야 합니다. 후다닥 저녁 밥상을 차려 밥을 먹고 나면 시계는 9시를 가리킵니다. 내 눈이 가리키는 볼록한 배는 녹초가 된 몸과 바꾼 것입니다.


  어느 날부터는 우리 집 밥을 꼭 내 손으로 해야 된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싹 버리고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가장 친절한 도우미는 '배달의 민족'이었지요. 어플에 접속하면 만 가지의 메뉴들이 촤르르 펼쳐졌어요.

  '뭐가 먹고 싶은 지 생각하지 마. 내가 널 위해 이 메뉴들을 준비했어! 골라봐, 마음껏!!'

  '귀찮게 나갈 필요도 없어. 기다릴 필요도 없어. 돈만 줘. 그리고 현관문만 열어.'

  배민은 아주 매력적인 어플이었어요. 특히 배달이 안 되는 제주시 산골에 살다가 먹고 싶은 메뉴만 고르면 배달이 되는 곳으로 이사를 오니 금세 최고의 주방 이모가 되어 주었지요. 배민을 만나고부터 저녁 밥상의 메뉴는 다양해졌고 유튜브를 보며 여유를 부릴 시간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 쯤이 지나자 첫 번째 고비가 왔어요. 배달 문화가 있어 천국이 부럽지 않았고, 용기만 열면 한 끼가 펼쳐지던 감동이 이제 지루해진 것이죠. 결국 먹고 싶은 게 없어지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또 배달 음식은 한 끼만 먹어도 평소의 일주일 치 쓰레기를 남겼어요. 용기를 분류하고 재활용이 가능한 것은 씻어 분리수거장으로 가는 일도 추가된 골칫거리였고요. 게다가 둘째 아이의 알레르기가 심해지거나 갑자기 몸이 붓는 날에는 플라스틱과 비닐로 된 포장용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배달 음식을 선택하고 즐긴 내 탓이라는 죄책감도 지울 수 없었어요. 지금 당장 우리는 배민과 헤어져야만 했어요.


  다시 종종걸음으로 퇴근해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어요. 이번에는 고기 위주의 '참 쉬운 메뉴' 대신 육식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집밥에 어울리는 반찬을 만들기로 했어요. 그래서 한 번은 감자채볶음을, 그다음은 계란말이를, 또 다른 날에는 계란프라이를 했어요. 정말 재료가 없는 날에는 양파만 달달 볶아 반찬으로 먹기도 했지요.

  '도대체 그동안 무슨 반찬을 먹고살았지?'

  냉장고 문을 열고 마트에서 사 온 야채들과 마주 보며 섰지만 이 재료로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차라리 육식은 채식보다 훨씬 쉬운 편이었지요. 마트에 야채를 사러 가는 일이 점점 줄어들더니 냉장고의 야채칸도 텅텅 비어갔어요.


  다시 손가락이 기억하는 어플, 배달의 민족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똑똑.

  오랜만에 먹는 바삭한 치킨, 취향대로 골라 먹는 마라탕까지 다시 저녁 밥상이 진수성찬이 되어 갔어요. 탕수육이 당기는 날에는 짜장면과 탕수육을 기다리며 '부먹'이냐 '찍먹'이냐 즐거운 기다림이 있었죠. 배민은 다시 제 마음을 파고들었어요. 현관문을 열면 나를 기다리는 따뜻한 한 끼를 신속하게 배달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우리의 재회가 당연하다는 듯 2,000원, 3,000원의 할인 쿠폰을 선물해 주었지요. 콩깍지가 씌었는지 배민은 시간과 돈을 알뜰하게 쓴 기분마저 안겨주었어요.


엄마, 이제 배달 음식 먹기 싫어요.  

 

   어느 날, 어렸을 때부터 심심하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던 첫째 아이가 배달 온 음식으로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 이제는 배달 음식이 물린다고 말했어요. 두 번째 고비가 찾아온 것이죠.

  "그렇지? 엄마도 살찌는 것 같아서 싫더라."

  우리는 그날의 만찬을 끝으로 다시 배달의 민족과 헤어지기로 결심했어요.

  to 배민, 얼떨결에 받은 이별 통보에 놀랐지?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마음이 요란스러웠어요. 헤어질 결심을 이렇게 갑자기 하는구나, 하는 마음보다 24시간 뒤에 다가올 내일 저녁 식사가 더 부담이 되었거든요.


  다음 날, 퇴근 시간이 다가오니 생각이 더 많아집니다. 그래, 결심했어!

  이번에는 저녁 식사를 함께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각자 잘하는 것을 나눠 저녁 밥상을 차리기로 했지요. 아주 든든한 파트너를 찾았어요. 누구와 함께일까요? 바로 우리 동네 반찬 가게들과 함께입니다.

    

한 끼를 위한 협업 @무지개인간

  

  <고사리 볶음>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어쩌면 내일 저녁밥까지 책임져 줄 고사리 볶음은 S 반찬 가게의 사장님의 손맛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제주에서는 어느 반찬 가게를 가나 고사리볶음은 대체적으로 무척 맛이 있어요. 저도 예전에는 찾아 먹지 않던 반찬이었지만 제주에 온 이후에는 최애 반찬이 되었지요.


  <제육볶음> 돼지고기 앞다리살로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제육볶음도 S 반찬 가게의 사장님의 솜씨입니다. 사장님의 요리 솜씨가 이 정도로 맛깔나지 않았다고 정확히 기억하는데, 해가 바뀌는 사이 사장님의 요리 실력은 어마어마하게 늘어있더라고요. 정말 맛있었어요. 우리 오랫동안 저녁 밥상을 함께 차려요.


  <미역국> 이 미역국은 N 반찬 가게 사장님의 손맛에 제 손맛을 더하는 바람에 '반(半)' 엄마표 집밥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보았습니다. 사장님의 소고기 미역국에 국간장을 더하고 우리 식구들이 아주 좋아하는 들깨가루를 팍팍 넣어 들깨 소고기미역국으로 새롭게 태어났어요. 아이들이 좋아하니 들깨 가루 좀 넣은 제가 다 뿌듯하네요.


  사진에는 없지만 <돼지고기 장조림>과 <메추리알 장조림>은 H반찬가게 사장님께서 뜨거운 불 앞에서 보초를 서며 조린 장조림입니다. 간간하니 양도 넉넉해 목요일까지는 아침마다 장조림 비빔밥을 먹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반찬가게 사장님들의 노고로 집에서 먹는 맛있는 저녁 밥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정말 맛있어서 오랜만에 두 그릇이나 먹어버렸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동네 반찬 가게와 협업, 분업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할 걸 그랬어요. 배가 볼록해지니 각자 잘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멋진 주부가 된 것 같아요. 

 

  그럼 저는 저녁 식탁에 잘하는 '무엇'을 얹었을까요? 음, 바로 먹을 반찬은 접시에 담고 나머지는 유리 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고요. 흰 쌀 밥을 지어 따뜻한 밥을 식탁 위에 올렸어요. 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반숙 계란프라이를 1인 1알로 준비했어요. 그리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식탁 정리와 설거지를 완벽하게 끝냈지요. 참! 동생이 식기 세척기를 강력히 추천하던데, 설거지도 식세기 이모님과 분업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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