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귀찮게'라는 핑계를 걷어차고 우선 집을 나섰습니다. 저보다 일찍 일어난 식구는 첫째 춘기뿐이지만 행선지를 밝히고 외출을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오늘 걸을 곳은 한라수목원입니다. 5분 거리에 있지만 자고 있는 둘째와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외출을 할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도 어릴 적 깜빡 낮잠이 들었다가 일어나 보니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이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었거든요. 어느 나이부터인지 저는 엄마는 시장에 가셨나 보다,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열 살 아이에게 이런 마음을 기대하는 것은 이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둘째가 씩씩하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있길 믿어 봅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각자 듬직한 역할을 해준다는 것은 참 좋습니다.
지난밤에는 세상모르고 잠들었는데 새벽에 비가 세차게 쏟아진 모양입니다. 비가 내려도 금방 빗물이 지하로 스며드는 제주에서는 듣기 힘든,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콸콸 콸콸, 경쾌한 소리에 나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주도 외 지역에서 데려온 나무들이 자라는 '도외수종원'을 지났습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플라타너스 나무입니다. 얼마 전 브런치의 이웃 작가님이신 유미래 작가님의 글에서 플라타너스 꽃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더 유심히 플라타너스 나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플라타너스에는 두 가지 추억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로수인 플라타너스 탓에 봄과 가을이 되면 알레르기로 고생을 했지만 부채처럼 생긴 커다란 잎과 줄기의 밀리터리 얼룩무늬를 멋있다고 생각하며 길을 걸었던 기억입니다. 또 하나의 추억은 아이들이 세 살, 일곱 살 때의 일인데 앞산에서 이 잎을 모아 엮어 왕관을 만들어 썼던 기억이 나네요.
사계절의 자연 속에 많은 추억을 보물처럼 숨겨 두었는데 혼자서만 꺼내본 것 같습니다.
아주 깊은 산속이 아니라 집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무척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후가 되면 멈출 저 흐르는 빗물 소리도, 이끼가 잔뜩 낀 언제 쓰러졌는지 모를 나무의 오랜 시간 그리고 사진에는 담지 못했지만 비가 그친 뒤 바쁘게 흐트러진 자연을 정돈하고 있는 공벌레와 개미의 분주한 움직임까지 지금, 이 순간에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천히 걸으며 마음에 담으려고 합니다.
어릴 때는 비가 오는 날이면 많은 빗물이 한꺼번에 흘러가는 이 길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길에 작은 강이 생긴 것 같았거든요. 이 작은 물길에서도 유속이 빠른 곳과 그렇지 않고 고운 흙과 낙엽이 쌓이는 곳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소인국 사람이 되는 상상에 빠지고는 했습니다. 나뭇가지를 주워 소인국 사람을 위한 다리를 만들어 주고는 했지요.
(저의 유년 시절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경북 예안의 시골 마을 이야기가 많습니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시골이라 그 마을이 아직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홉 살, 11개월의 예안 살이가 평생 우려먹는 글감이자 삶의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입니다.)
둥근돌, 뾰족한 돌이 콕콕 박힌 맨날 걷기 구간입니다. 지난봄에 걸어본 적이 있었는데 아프지만 걷고 나니 개운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오늘도 그 자리에 섰습니다. 아픈 것을 알지만 걷을 결심을 했지요. 지난겨울에 축구를 하다가 빠진 두 엄지발톱도 새로 잘 자랐네요. 아직 끝부분이 더 자라야 하긴 하지만 이만하면 예쁘게 자라고 있는 것 같아요.
한 발씩 내디뎌 봅니다. 역시나 아프네요. 아파도 말할 사람이 없어 속으로만 소리를 지릅니다.
"발 아프요?"
"그럼요, 너무 아프네요."
"할딱할딱 뛰시오."
어찌 아셨습니까, 제 마음.
한라수목원을 산책하며 모르는 사람과 가벼운 대화를 나눌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다양한 지역의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저에게 익숙한 경상도 말은 더 귀에 쏙쏙 들어오지만 낯선 전라도 말이라도 그들이 건네는 말은 다정합니다. 수목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몇 마디를 주고받고 돌아서면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러면 마음속으로 건네지요.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빕니다.'
숲 속에 사는 동물들은 대부분 축축한 숲의 기운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달팽이에게는 비가 막 그친 아침의 숲은 즐거운 산책 시간이 될 것 같아요. 타운하우스에 살 때는 정원의 돌담에서 자주 만나던 제주배꼽털달팽이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배꼽털달팽이는 볼 때마다 너무 귀엽습니다. 명주달팽이만 보다가 납작한 접시처럼 생긴 집을 이고 다니는 배꼽털달팽이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지요. 우리나라 육지 달팽이 중 가장 큰 동양달팽이도 찾아보았지만 오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양달팽이도 알을 받고 방생한 적이 있는데, 다시 기회가 되면 관심 있게 관찰해 보고 싶습니다.
애기뿔소똥구리도 만났습니다. 움직임이 무척 둔해진 것을 보고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작은 개미들에게 포위된 것 같습니다. 개미를 털어주었지만 변화는 없었지요. 슈퍼맨 옷을 입고 동네를 날아(?) 다니던 우리 집 막내의 세 살 때 모습이 생각나는 귀여운 아기뿔소똥구리인데 안타깝습니다. 밤 사이 내린 비가 애기뿔소똥구리의 생을 단축시킨 것 같습니다. 곧 자연으로 돌아갈 것 같아요.
비가 그친 틈을 타 새로운 생을 시작한 곤충도 있었습니다. 도시에 살 때는 커다란 말매미만 보다가 숲 속에서 작은 매미를 보니 참 귀엽습니다. 참매미라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며 다시 보니 애매미인가 헷갈리지만 여하튼 작은 매미입니다. 갓 우화한 옥색의 매미는 소나무에 긴 이끼처럼 앉아 있습니다. 우화한 매미가 날개를 말리며 숨을 고르는 자리 한참 아래에는 오늘 새벽까지 살았던 허물이 놓여 있네요. 축축한 나무껍질에 날카로운 다리로 붙어있는 매미의 허물을 만났습니다. 매미는 날개를 잘 말려 인근 나무로 날아간 것 같습니다. 곧 해가 쨍한 날에는 나무 사이사이로 매미의 울음소리가 채워질 것입니다.
여름의 수목원은 참 싱그럽습니다. 초록잎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과 빛을 머금은 채도가 다른 초록잎들의 어울림을 좋아합니다. 그 풍경이 좋아 한라수목원 안에 있는 광이오름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는 마루에 누워 하늘을 보며 명상을 하다가 내려오고는 하지요.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버섯도 버섯꽃처럼 예쁘게 피어납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은 언제나 풍성합니다. <철학이 우리 인생에 스며드는 순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어크로스 출판사)에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소로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 검사"로 여겼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있다.
-소로처럼 보는 법
비가 그친 뒤, 수목원 산책은 삶의 희로애락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에 안도할 수 있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수목원 산책에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입술대고둥을 만난 것입니다. 고둥은 보통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육상에서 사는 고둥을 아주 드물게 만날 수 있습니다. 8년 전에 대구 앞산에서 처음 보았는데 7년 전 제주 여행에서 또 한 번 만난 적이 있지요. 이후로 한 번도 못 보다가 오늘 만났습니다. 그동안의 그리움을 싹 날려주는 듯 여러 마리를 보았어요. 저도 7년 만에 만나는 반가운 생물이라 동영상으로 담아보았습니다.
몸은 작은데 그에 비해 집은 너무 커서 움직이는 게 힘들어 보입니다. 그래도 정말 사랑한다면 그들의 생활 방식을 인정해야지요. 사람은 그저 '잘 살고 있구나!' 반가운 마음으로 눈으로만 보면 그만입니다. 이 입술대고둥을 보니 또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두 번의 입술대고둥과의 만남에는 늘 아이들과 함께였는데, 오늘은 혼자서 보네요. 그래도 나와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고요한 아침 시간을 감사히 즐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흐른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수로를 따라 흘러가는 물속에 나뭇잎을 따서 배를 띄웠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곳과 그곳을 흐르는 물, 지나가는 나뭇잎. 양말을 벗고 맨발을 내디뎠던 시작점으로 돌아오며 지나간 시간 속에 스쳐가는 나뭇잎처럼 특별한 순간을 숲 속에 많이도 심어두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은 앞으로 흐르기만 하지만 곳곳에 심어둔 추억 덕분에 저는 가끔 시간을 돌려 옛 일을 꺼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방금 흘러간 나뭇잎을 물과 제가 기억하듯 시간 속에 담아둔 추억도 그 순간을 함께한 사람들과만 나눌 수 있는 순간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브런치 글을 읽으며 여러 작가님의 사는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어요. 때로는 이렇게 재미있고, 유익하고, 귀한 글을 이렇게 쉽게, 공짜로 읽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껴둔 이야기를 꺼내주신 만큼 '라이킷'과 함께 못 읽은 글은 시간을 내서 다시 읽으러 갑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하루를 함께 해주신 많은 사람들을 통해 매일 하루를 행복하게 채우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브런치 작가님들의 지분도 크고요^^
삶의 매 순간, 그 시간을 함께해 준 인연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산책이었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