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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03. 2024

형이 알려줄게

형, 초 4야

  아, 이 일은 어쩌면 글을 써야만 하는 사람의 숙명일까요?

  요즘 우리 집 막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아직 글로 쓰지 않은 일이 구름풍선처럼 자꾸 따라다닙니다.

  '도대체 언제 쓸 거야?'

  마치 이야기 풍선이 빨리 좀 터트려달라고 난리를 치는 것 같습니다.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글로 잘 살려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그래도 편안한 마음으로 기록이라고 생각하며 펑, 터뜨려봅니다.


  그럼 펑!!

  이 대화는 막내가 65일간의 긴 겨울 방학을 끝내고 4학년이 되어 학교를 가기 하루 전인 지난 3월 3일 밤에 나눈 것입니다. 막내는 새 학년이 되는 설렘에 잠이 오질 않나 봅니다. 잘 준비를 다 하고 누웠는데 종알종알 아주 밤을 새울 기세로 말이 말을 몰고 오며 끝이 없더라고요.

  "우리 선생님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형은 3학년 때부터 계속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나도 이번에 남자 선생님이면 어떡하지?"

  "그런데 나는 늘 여자 선생님이더라. 이번에도 그렇겠지? “

  “선생님은 친절하실까?"

  "난 친절한 여자 선생님이 좋은데..."

  "아는 친구는 있겠지?"

  "그래도 유찬이가 같은 반이라서 진짜 지인짜 다행이야."

  "다른 친구들은 아직 아무도 모르거든."

  "4학년이 되어서 긴장되니?"

  "그런데 기대되는 마음이 더 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운 시작은 두렵지요. 하지만 지금 잘 시간이 지났는데도 잘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 어린이는 다행히 두려움은 아니네요. 그래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 "얼른 자자."라고 했습니다. 저도 다음 날에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준비를 해야 했거든요.


  "잠이 안 와."

  "눈 감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세다 보면 잠이 올 거야."

  "그런데 엄마. 난 이건 알아."

  "선생님이 내일 뭘 입고 오실지는 알아."

  "담임 선생님? 아직 어떤 분 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다닌 지 벌써 1학년, 2학년, 3학년, 이제 4학년이 되잖아."

  "그래서 이제 좀 알 것 같아."

  "그래? 뭔데, 뭔데?"

  아, 진짜 뭔데 뭔데? 초등학교 6년 과정, 중학교 3년 과정, 고등학교 3년 과정을 이수하며 열두 분의 담임 선생님을 만난 저는 모르는데, 우리 막내는 단 3년의 과정만으로 아주 대단한 비밀을 알아낸 것 같습니다.


  너무 궁금한데 아이는 자꾸만 뜸을 들입니다. 아이는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할수록 이런 대단한 사실을 찾아낸 자신이 엉뚱하면서도 웃겨서라고 합니다. 그래도 엄마도 같이 웃고 싶은데...


  "학교 선생님들은 개학날 제일 예쁜 옷을 입고 오신다!"


  "뭐?"

  "내가 이제 4학년이잖아. 1, 2, 3학년 때 다 그랬어. 개학하는 날마다 선생님들은 제일 아끼는 옷을 입고 오시더라."

  초등학교 4학년 '형님'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진정시키고 귀를 기울입니다.

  "정말? 그런 옷이 어떤 옷인데?"

  "뭔가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에 입는 옷 같은 거."

  "예쁜 치마에 단추가 달린 단정한, 형아 교복 같은 그런 옷인데 반짝거리기도 해."

  "에이, 설마. 그날만 그러시겠니?"

  "응, 개학날만 입어."

  "내가 이제 4학년이잖아. 1, 2, 3학년 동안 다니면서 선생님이 그 옷을 또 입고 오시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 아이가 얼른 자야 저도 '육퇴'를 하는데 너무나 공감이 되는 이야기에 큰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형님'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마흔(더하기 알파)의 경험을 더해 크게 공감했던 부분을 적어봅니다. 제 몸과 마음이 기준입니다.

  담임 선생님께서 개학하는 날에 예쁘게 입고 오는 마음은 학생들을 예쁜 마음으로 대하고 싶은 결심'그러니 너희들도 예쁘게 대해달라'는 당부의 표현이겠지요. 그렇다면 왜 개학날에만 그 옷을 볼 수 있었냐, 왜냐하면 그건 엄마가 되어 보니 그 이유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더라고요. 우선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격식을 갖춘 차림보다 활동하기 편안한 옷이 좋습니다. 물론 반짝이는 소재의 옷이나 예쁜 치마를 입어도 옷차림에 신경 쓰기보다는 일에 금방 익숙해지지요.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몸에 옷을 끼워넣기가 힘들어집니다. 등, 엉덩이 같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살이 금방 찌더라고요. 그러니 개학이라는 특별한 날을 맞아 불편함을 감수하고 몸을 예쁜 옷에 구겨 넣어 입고 가는 일은 실로 어마어마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개학날만 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공감이 가는 인간적인 모습이고요.


  아무튼 이제 아이의 머리 위로 달려있던 이야기 풍선 하나가 톡 터졌습니다.

  아,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저는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대나무숲을 나가 일터로 갑니다.

  즐거운 한 주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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