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개인간 Jun 07. 2024

한국말, 그 미묘한 차이


  나 이 곡 엄청 애정하는데 (하트눈)

   

  이틀 전에는 인스타그램에 취향을 공유했어요. 한 번 빠진 음악은 몇 주 동안 종일 듣는 질척거리는 음악 감상 습관이 있는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헤어졌던 슈만-리스트의 '헌정(widmung)'이 다시 생각났거든요. ‘헌정'은 사실 언제 들어도 좋아서 모든 계절에 잊지 않고 듣고 있는데 이번에 새로 들은 피아니스트 지용님의 연주도 참 좋더라고요. 평범한 귀를 가진 음악 감상가는 그동안 손열음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을 때는 클라라가 된 마음으로 들었는데, 지용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건반을 누르는 뼈의 무게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결혼식 전날,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으로 가득 찬 슈만의 마음으로 곡을 듣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느낌을 기록해 두고 싶었어요. 저에게는 '지용'이라는 연주자의 이름과 '헌정'이라는 연주곡의 이름만 있어도 그 안에 담긴 감동과 행동이 살아나지만 그래도 기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잖아요. 그래서 몇 문장을 더 적어 인스타그램 피드글을 작성했지요.

  


무지개인(공)간의 인스타그램인데, 우리 인친도 할까요?


  

  글을 올리자마자 아는 언니가 댓글을 달았어요.

  '나 이 곡 엄청 애정하는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 '잘' 섞이는 게 이런 걸까요? 처음에 애정하는 곡이라고 썼다가 너무나 개인적인 느낌인 것 같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다시 적기로 마음먹고 쓴 피드거든요. 그냥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라는 느낌으로 말이죠. 실제로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받기도 하고, 방구석 1 열인 듯 감상하지만 개인의 취향은 각자 다르니 조심스러워서요. 그런데 댓글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언니가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언니, 나도 애정하는 곡이야.'


  같은 곡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은데, 우리에게 애정이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곡이라니! 10년이 넘게 알고 지낸 사이지만 교집합적인 요소를 또 발견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기쁜 일입니다. 아마 언니와는 좋아하고 사랑하고 애정하는 것의 그 미묘한 차이를 같은 눈으로 보고 있을 것 같아요. 또 하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어요.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은 때로는 유연한 태도를 요한다는 것을요. 많이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는 부분이 아직도 있더라고요. 혹여 음악적 취향이 아니라 다른 논제에 관한 일이었다 해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무슨 '애정'이라는 단어 하나에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했냐고요? 그러게요. 좋아하는 곡이라고 했는데 애정하는 곡이라는 것을 알아준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도 새로운 모습을 알아가게 되는구나, 느꼈어요. 또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구나,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구나, 있는 그대로 사물과 사람을 보는 것은 변할 수 있고, 달라질 수 있다는 마음이 필요하구나, 때로는 뚜렷한 이견이 있는 일에서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어야겠다, 는 길고 긴 생각을 했네요. 마치 참기름을 바른 강아지로 호랑이를 줄줄이 꿰어 잡은 전래동화처럼 말입니다. 왜 그런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았더니 한국말의 그 미묘한 차이 때문이었어요.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애정하는 것.


  좋아한다는 말은 부담 없고 무난한 표현이에요. 사람에게 쓰는 좋아한다는 표현을 제외하고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그런 것이라 생각해요. 요즘 제주에서는 목향 장미가 한창이지요. 장미를 좋아한다는 말은 예쁘다는 말과 동급이지만 우리 집에 장미가 없더라도 괜찮잖아요. 밖에 나가면 달콤한 귤꽃의 향이 코끝에 닿고, 눈부신 백합이 피기 시작했고, 샛노란 루드베키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음 하나에 여러 개의 좋아하는 것을 담아도 무거워지지 않아요. 예외적으로 호감이 시작되는 남녀 관계에서 사람에게 쓰는 좋아한다는 말은 다르더라고요. 앞으로 주고받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서사를 끌어내더라고요.


  사랑한다는 말은 좋아한다는 말보다 더 선명한 해상도를 지닌 표현이에요. 좋아한다는 말에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감이 생기며 투명하게 보이던 것이 점점 색을 드러내며 짙어지지요. 요즘 저는 일을 통해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일을 하는 모든 시간을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과 계속 사랑하기 위해 노력까지 더하지요. 가끔 연예인들이 열애설을 알리며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분은 제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 줘요.'라고. 그게 사랑인 것 같아요. 사랑한다는 말은 그 대상이 생명을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게 해 줘요.


  '애정하다'는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미 너무나 익숙하게 쓰고 있어서 느낌으로 정의해 보기로 할게요. 언어의 사회성을 소재로 쓴 <프린들 주세요>에 나오는 '프린들=볼펜'이 된 것처럼 언제부턴가 애정한다는 표현을 흔하게 쓰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애정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두 사람에게 받은 '헌정'이 왜 우리 마음에 와닿았는지 찾아보았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랑하는 것에 추억을 더하니 '애정하다'가 되더라고요. 저에게 '헌정'은 음악회에서 난생처음으로 휴지가 모자랄 정도로 눈물을 쏟으며 들은 곡이고, 책과 드라마를 통해 다시 만났어요. 축적된 추억으로, 이제는 일상에 '헌정'을 끼워 넣으며 곡을 아껴 듣고 있어요. 잔디를 깎는 정원사처럼 주기적으로 돌보는 일, 그게 저에게는 애정하는 헌정입니다.


  조금 전 언니가 통영 여행을 다녀왔다며 '헌정'을 배경음악으로 여행 영상을 보내주었어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반가운 마음에 코도 찡긋하게 되네요. 어쩜 우리는 '애정하다'라는 그 미묘한 차이를 같은 온도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헌정'을 애정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다정한 독자님께서도 보물 찾기처럼 내가 애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때로는 좋아하는 것들 속에서 애정하는 것 하나로 인해 삶이 단순하면서도 풍성해지더라고요. 




  다정한 독자님, '헌정'을 애정하게 만든 추억과 책으로 만나는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아래의 두 편으로 글을 읽어보세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brunch.co.kr)
  가을에는 사골국보다 더 좋은 책 한 권 (brunch.co.kr)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두 피아니스트의 '헌정'도 함께 올려드립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하세요^^


SCHUMANN-LISZT Widmung | Yeol Eum Son (손열음 | 슈만-리스트 헌정) (youtube.com)
지용│슈만-리스트, 헌정 (R.Schumann/F.Liszt, Widmung) Pf. Ji  #광고없음 (youtube.com)


 

     

매거진의 이전글 형이 알려줄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