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개인간 Sep 05. 2023

가을에는 사골국보다 더 좋은 책 한 권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책은 참으로 진정한 벗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일상이 이어지지만 시간을 쪼개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자꾸만 웃음이 나고, 행복하다는 마음이 샘물처럼 퐁퐁 솟아오릅니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밤을 새워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었습니다.


  한 권을 책을 읽는데 쓴 시간보다 그 책을 생각하며 스토리와 작가 그리고 지금의 저를 이어가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느끼고 있어요. 여름의 끝자락에 사골국보다 더 맛있는 책 한 권으로 몸보신을 하는 기분입니다. 앗, 여러분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사실은 너무 아파서 보약을 지었습니다.

  아무튼 마음이 맞는 사람과 1년 내도록 이 책으로 수다를 떨고 싶을 정도로 매일 새로운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미 블로그, 인스타그램, 독서 모임 카페에 세 편의 글을 올렸지만 자꾸만 말하고 싶어 집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수다쟁이가 된 저에게 이제 그만 브런치스토리에 글로 정리하라고 합니다. 물론 9월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수필집 <자기만의 방>을 읽기로 했기 때문에 이쯤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와 헤어져야 마음속에 <자기만의 방>을 위한 방도 하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책 속 이야기에 빠져있을 때의 생각과 느낌, 책을 손에서 놓고 나서야 이어진 개인적인 취향과 끌림에서 알게 된 사실, 마지막으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해, 3가지 시선에서 적어보려고 합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책장을 넘기는데 하룻밤이 걸린 부분이 딱 2곳 있었습니다. 바로 1장과 7장입니다. 1장은 책의 처음이자 작가가 제목만큼 공들여 적었을 첫 문장이 나오는 장입니다. 독자에게는 이야기가 펼치질 무대와 주인공들이 무대 위로 나오는 그런 두근거리는 페이지이죠. 그런데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폴'입니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로제'입니다. 제가 아는 '폴'은 스무 살에 만난 캐나다에 사는 키가 무척 크고 잘 생긴, 어린 나이에도 책임감이 강했던 17살의 남자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로제'는 그룹 블랙핑크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 가수입니다. 경험이 주는 고정관념을 깨는데 집중력을 도둑맞았습니다.


  두 번째로 버퍼링이 걸린 곳은 6장이 끝나고 7장이 넘어가는 부분입니다. 개인적으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6장에는 시몽이 '푸른 쪽지'라고 불리는 속달 우편으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편지와 함께 브람스의 콘체르토 연주회에 초대합니다. 그리고 시몽과 폴은 함께 시간을 보내죠. 저는 폴이 연주회에 가지 않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어요. 그런데 시몽의 초대에 응해서 얼마나 기쁘던지요! 6장에서 끝나면 참 좋았을 걸, 7장은 메지라는 새로운 여자와 주말을 보낸 폴의 연인 로제의 ‘유쾌한 주말'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찢어버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참았지요. 제 책은 소중하니까요.

  

  6장에는 의미 있는 문장들도 눈에 많이 들어왔어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시몽의 물음에 폴은 갑자기 거대한, 잊고 있던 모든 것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아직도 갖고 있기는 할까?'(60p.) 생각하게 되죠. 이 생각은 더 나아가 자신이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환기의 과정이 참 좋았습니다. 무언가에 몰두할 때, 특히 '사랑하는 중'과 같은 감정적으로 빠져있는 상태에서 환기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감정의 균형을 유지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에 대한 집착 대신 자기 자신에 대한 균형을 맞춰준달까요. 물론 무지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줄곧 앞장서는 입장, 대개 혼자 애쓰는 입장이 되어 있었고, 이제 그 일에 지쳐 있었다.'(106p.)는 부분에서 깊은 공감을 한 독자라면 충분히 6장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입니다.


  슈만의 '헌정'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날 선물한 곡인 '헌정'(리스트 편곡)을 남자 주인공 피아니스트 박준영이 연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드라마에서는 많은 연주곡들이 나왔지만 특히 저는 이 곡만 몇 주째, 몇 시간씩 듣고 있어요. 처음에는 2019년 클라라 슈만 탄생 200주년 콘서트 무대에서 울린 유일한 피아노곡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틀 후 6장에서 7장으로 넘기고 싶지 않은 마음을 마주하면서 그 이유를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 생활이 행복했는지 어떤지는 사실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저는 유능한 자신의 재능마저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클라라가 결혼 생활 중 적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활동을 이어갈 수 없었고 우울과 상실감에 놓였지 않을까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가령 슈만과 클라라의 집에는 피아노가 2대 있었지만 예민한 슈만이 작업하는 동안 클라라는 피아노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여덟 아이를 돌보는 일도 전적으로 클라라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슈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소원은 클라라가 음악가(예술가)로서 삶보다는 대중에게서 잊혀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길 바랐기 때문에 클라라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자기 스스로도 이기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약 200년의 시간이 흘렀고, 과정은 모르지만 결과만은 알고 있는 2023년에 사는 저는 안타까운 마음이 배로 커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폴, 결혼식 전날의 가장 행복한 순간에 머물고 있는 클라라, 게다가 20대의 어떤 시간이 있는 저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장 달콤한 시간에 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등대처럼 이 분 간격으로 그녀의 얼굴에 머물며 혹시 그녀에게 틈이 나지 않는지를 살피고 있던' 시몽처럼 가장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각각의 방에 미소를 짓고 있는 주인공들을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오래 붙잡아두는 방법으로 <헌정>을 들으며, 피아노 건반의 소리와 함께 안도와 위로를 마음속에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6장까지 읽고 만난 독서 모임에서도 브람스와 클라라의 관계는 정확하게(또는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랑이다', 혹은 '우정이다'라고 이름표를 붙이고 싶지만 자꾸만 구구절절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모임 후 그날 밤 책을 모두 읽으며 '브람스 같은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어!'라는 생각은 완전히 지우게 됩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시몽은 폴과 브람스의 콘체르토에 가기 전 교외의 여관 근처에서 어떤 여자와 함께 있던 로제와 마주칩니다. 그때 시몽은 이 만남에 대해 함구해 줄 것을 명령하는 듯한 로제의 시선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는 로제가 두렵지 않았다. 그가 두려운 것은 폴이 고통스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자기 입을 통해 그 여자에게 나쁜 소식이 전해지는 일 같은 건 결코 없으리라.'(63p.) 그 순간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브람스의 모습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브람스 같은 사람이 있구나!'하고 생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어요. 물론 저는 만나보지 못했거나 알아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하하.

   

  40여 년에 걸친, 누군가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우정이라고 말하는 관계를 맺은 클라라와 브람스. 어쩌면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나를 사랑하듯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이 둘의 관계를 계속 유지시켜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폴에게는 유난히 특이하게 여겨진 '사랑은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는 시몽의 말은 저에게도 가장 진심을 담은 약속이자 고백처럼 보였습니다. 아마 클라라에게도 그렇게 느껴졌을 것 같고요. 아, 그렇지만 시몽이 브람스를 모델로 한 인물이라는 것은 제 생각입니다. 물론 책에서는 서른아홉의 폴이 14살 연하인 스물다섯의 시몽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나이가 공개되고, 실제 클라라와 브람스의 나이 차이도 14살 차이였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시몽을 보고 브람스를 떠올려주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저는 시몽에 대해 작가의 바람대로 아주 잘 따라간 것 같습니다.



  책을 읽으며 보물을 캐듯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아니라 점 세 개를 찍은 말 줄임표로 끝나야 한다고 강조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입니다. 처음에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좌절로 얼룩진' 모습으로 표현하고, 애인인 로제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에 갇힌 폴의 모습을 보며 머뭇거리고, 자신이 없는 '...'으로 느꼈습니다.

  "브람스 괜찮은 사람이죠. 좋은 사람이죠. 네... 좋은 사람..." 이런 느낌으로 말끝을 흐리면서 말입니다.

   가끔은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어요. 프랑스인들이 대체적으로 브람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니,

  "(저는 브람스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은) 브람스 좋~아하세요..."라고 비꼬는 듯한 마음을 담아, 세상이 브람스 같은 사람은 절대 없다는 마음으로 제목을 읽어 보기도 했어요.

  지금은 확신의 청유형 문장으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입니다.

  브람스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더라고요.

  우리 함께 브람스를 좋아할까요?

  


   ※ 제가 읽은 도서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입니다. 2023년 5월 10일에 펴낸 64쇄 본인데, 같은 책이라도 인쇄 시기에 따라 페이지 차이가 조금씩 있더라고요. 그래서 인쇄 날짜를 함께 밝혀 드립니다. 책 표지는 마르크 샤갈의 <생일>입니다. 왜 이 책의 표지로 이 그림을 골랐는지 아직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부분도 어느 날 우연히, 선물처럼 알게 되는 날이 오겠지요?

   



  줄이고 줄였지만 자꾸만 길어지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야기입니다. 다른 글을 준비하다 꼭, 이 글을 완성시키고 다른 글을 올리고 싶어 시간이 걸렸지만 드디어 썼습니다.

  내일부터는 일상 에세이도 자주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을이 다가온 것 같지만 여전히 낮에는 많이 덥습니다.

  건강 더 잘 챙기세요.

  주변 사람들의 건강은 어떤지, 잘 지내는지 궁금한 가을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