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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May 29. 2024

보일러에서 시작된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턱이 뾰족한 사마귀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톱날 같은 앞다리를 드러내며 위협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곤충입니다. 머리와 가슴에 비해 무거운 하체를 가진 체형이라 오리처럼 뒤뚱뒤뚱 걸어 다닐 것 같은데 우아하게 레이스 같은 날개를 펴고 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귀는 인간이든 곤충이든 동물이든 눈앞에 있는 게 무엇이든 간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뾰족한 턱을 들고 톱날을 세워 날아오르며 치명적인 공격을 할 것 같은 무서운 곤충입니다. 사마귀가 이렇게나 무섭다고요? 네, 제가 생각하는 사마귀는 이렇게나 무섭습니다.


  사마귀를 처음 본 곳은 국민학교 3학년 때 집 근처에 있는 아파트 놀이터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마귀를 보았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설마요. 설마 태어나서 10년 동안 사마귀를 한 번도 본 적이 진짜로 없었을까요? 그러나 확실하게 사마귀가 '이것은 사마귀'로 각인된 날은 '열 살, 집 근처에 있는 아파트 놀이터에서'가 맞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곤충 채집을 워낙 좋아해서 그날도 방아깨비를 찾느라 한쪽 다리로 잔디밭을 훑고 있었지요. 또래 친구들은 어지러움을 견디는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손에 쥐가 나도록 '지구본(지구 모양의 정신 원심 분리기)'에 매달려 있는데 내도록 땅만 쳐다보고 있는 제 모습을 지켜보던 한 친구가 벽돌로 쌓은 화단 울타리를 가리키며 말하더라고요.


  "무지개인간아, 이건 사마귀야. 절대로 만지면 안 되는 거야. 절대."

  "사마귀가 손등에 앉아 피부를 뜯어먹으면 이상하게 생긴 뭐가 나."

  "그런데 뭐, 많이 아프지는 않을 거야."

  안 그래도 (눈이 커서) 겁쟁이였던 열 살의 무지개인간에게 겁이란 겁은 다 주고 'so cool'하게 할 말만 하고 퇴장해 버린 그녀. 이름도 생각이 안 나네요. 이름이라도 떠올랐으면 이 글에다 길이길이 고정을 해두는데 말입니다. 흰 티를 입었고 단발머리에 통통한 얼굴을 가졌던 놀이터 친구였는데 아무리 떠올려도 이름이 도통 생각나지 않으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요.


  어쨌든 이날부터 사마귀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곤충'이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요. 아마도 평생. 그리고 아마도 평생 저는 사마귀와 눈을 마주 본다거나 자세히 관찰을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이제는 사마귀와 피부에 생기는 물사마귀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을 알지만, 야비해 보이는 역삼각형의 머리와 무엇이든 두 동강 낼 것 같은 가시돌기가 있는 다리를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든요. 게다가 아직까지 동그란 머리와 매끄러운 다리, 선한 눈매, '해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마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마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곤충입니다.


  아무튼 무서운 사마귀 이야기를 왜 쓰게 되었냐면 바로 어젯밤에 (사)춘기와 이야기를 하다 너무 재미있어서 이걸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무슨 웃긴 일이 있었냐 하면 제가 요즘 알게 모르게 갱년기가 '올랑말랑' 하거든요. 아, 글쎄 여름이 다가오니 변온동물처럼 체온이 얼마나 올라가는지 너무 덥더라고요. 그래서 유리잔에 얼음을 채워 찬물을 붓고 한 잔 들이켠 다음에 거실 창문을 활짝 열며 춘기에게 말했죠.

  "춘기야, 엄마는 보일러가 된 것 같아. 몸이 끓는다. 끓어."

  그랬더니 춘기가 웬일로 최선을 다해 받아줍니다.

  "엄마, 보일러 회사 중에 곤충 있잖아. 뭐였지요?"

  

  그때 제가 바로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 머뭇거리는 사이에 춘기가 먼저 생각이 난 듯 말합니다.

  "아! 생각났어요! 바퀴벌레?"

  이 밤에 바퀴벌레 이야기를 하다니! 무섭게.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왔지만 춘기는 사랑스러운 제 아들입니다. 그리고 중 2입니다.

  "이 녀석아, 귀뚜라미잖아. 귀뚜라미 울겠다."

  덥다는 이야기를 보일러에 비유했더니 바퀴벌레를 거쳐 귀뚜라미를 찍었습니다. 또 다른 의식은 보일러에서 바퀴벌레에 머물러 있다가 바퀴벌레를 보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소름이 돋는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바로 사마귀지, 하고 흘러갔네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쓰다 보니 의식의 흐름을 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버지니아 울프가 고안한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기법이 떠올랐고, 그렇게 쓰는 글은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쉽게 생각했던 생각나는 대로 쓰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알았네요.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라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쓴 작품들이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을 겨우 한 발짝만 따라가 보았을 뿐인데 숨이 차오릅니다. 그래도 마구잡이로 펼쳐지기만 했던 것들을 무사히(혹은 대충이라도) 봉합해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은 뿌듯합니다.

  이번 시도로 흐름을 따라가며 글을 적고 책까지 쓴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온 모든 책과 작가님께 존경을 담아 <보일러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끝내려고 합니다.



  다정한 독자님, 오늘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뭔가 엉뚱한 곳에 문을 연 상점 같은 기분으로 이 글을 써보았는데, 어찌어찌 연결이 되어 완성이 되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독자님들께서 놀라시지 않도록 바퀴벌레 이야기는 비중을 개미만 하게 줄이고 대신 사마귀 이야기를 커~다랗게 썼으니 '이렇게라도 쓰고 싶구나!'라는 저의 쓰기 갈증을 헤아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세요.

  

  번외로 의식의 흐름 기법의 시작,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은 이야기도 올립니다.

  멋진 언니, 버지니아 울프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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