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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May 28. 2024

여름 렌즈를 끼고

"참 밝고 예쁘다."


  현관을 나서며 동시에 손으로 햇빛가리개를 만들면 여름이 코앞에 왔다는 신호입니다. (사)춘기에 지지 않으려고 갱년기가 준비운동을 하는지 작년부터 여름은 유난히 뜨겁고 눈 부시고 만사 귀찮고 축축 처지는 계절입니다. 본격적으로 오지도 않았는데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은 여름이지만 그래도 11년째 지치지도 않고 즐겁게 해내는 '제철 행복'이 있습니다. 바로 나비를 키우는 일입니다. 올해도 채집을 위한 산책을 하며 한 달 만에 겨우 호랑나비 애벌레를 찾았습니다. 기후 변화 탓인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예년보다 한 달이나 늦게 꼬물 애벌레들을 만났네요.


  애벌레라고?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님께서도 눈을 크게 뜨셨겠죠? 그래요, 팔랑팔랑 호랑나비의 애벌레가 맞습니다. 호랑나비 애벌레를 기르는 일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11년 전에는 배꼽시계가 울 때를 빼고는 채집통 앞에서 관찰을 했는데, 이제는 능숙한 호랑나비 집사가 되어 아침에 먹이를 챙겨주고, 경단 같은 똥만 치워줍니다. 키울 때는 먹이를 가장 신경 쓰는 편인데 주로 운향과 나무의 여린 잎을 줍니다. 보통은 호랑나비 애벌레가 원래 먹던 잎과 같은 종류를 구해주지만 올해는 집 근처에서 큰 산초나무를 발견해, 쉽게 키워볼 계획으로 식사 메뉴를 바꿔보았어요.


그거 먹는 거야. 마치 장애물 넘기만 하는 듯한 애벌레에게


  그런데 11년 만에 육아 난이도 최상의 애벌레들을 만난 것 같습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편식하는 애벌레를 만났네요. 전날 넣어둔 신선한 산초나무 잎이 하루가 지나도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 2~3mm가 된 1령 애벌레들에게 "이건 장식이 아니야. 먹는 거란다"라고 말로 가르쳐주었는데 귀를 닫았는지 아주 똥고집을 부립니다. 어쩔 수 없지요. 속 깊은 집사가 잘 달래면서 키울 수밖에요. 그래서 호랑나비 집사는 귀한 애벌레들의 단식 투쟁에 알에서 깨어나 처음 먹었던 그 잎을 구하러 20분을 달려 옛 동네로 갔습니다. 앞으로 매일 가게 될 것이라는 문장도 여기에 덧붙여 적어 놓습니다.


  9시가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뜨거운 기운이 땅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눈을 잔뜩 찡그리며 얼른 잎을 따서 가야지 싶어 연둣빛의 예쁘게 생긴 여린 잎을 골라 따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낯익은 차가 다가오는 게 보입니다. 아는 사람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손을 흔들었죠. 가끔은 머리보다 손이 더 똑똑합니다. 손은 벌써 반갑게 흔들고 있는데 머리는 멈춘 차에서 창문을 내려갈 때까지도 모르는 사람이면 어쩌나 얼마나 긴장을 하는지요. 휴, 다행입니다. 아는 얼굴이 맞네요. 이 동네에 살 때 텃밭 야채도 나눠 먹고 정원도 함께 가꾸던 이웃 언니입니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나면 차 한 잔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이렇게나 흘러갔네요. 반가운 마음을 나누기 위해 함께 언니네 집으로 갔습니다.


  이사를 가기 전날, 눈물을 보이며 너는 뭘 하더라도 다 잘 될 거라는 언니의 말과 그 축복대로 잘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함께 마시는 따뜻한 커피 안에는 2년이라는 시간이 녹아 있습니다. 오랜만에 마주 앉으니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낯설어집니다. 그래도 추억이나 정이란 건 이런 걸까요? 대화는 늘 하던 사람과 할 얘기가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가 봅니다. 금세 마음이 빗장이 풀리며 시간의 틈이 채워집니다. 언니는 말풍선 사이사이에 자꾸 예뻐지고 밝아졌다며 정원이 핀 금계국 한 송이를 얹듯 고운 말을 보내줍니다. 하긴 스무 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 언니에게 지금의 저는 얼마나 싱그럽고 예쁜 친구일까요? 그래도 제 눈에는 언니가 꾸민 한층 더 화사해진 집 안 분위기가 마치 일상을 지켜내는 건강한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파트는 살 만해?"

  주택 단지인 옛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늘 받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매번 같은 대답을 합니다.

  "적응이 안 되네요."

  거실창 밖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잎들을 보며 대답했습니다. 창문 너머로 주차장에 빼곡한 차들만 보이는 아파트 생활은 이것부터 불만족입니다. 게다가 요즘처럼 노을이 예쁜 계절에도 넓은 하늘 대신 건물 사이사이의 빈 틈에 보이는 피자 조각만 한 크기의 하늘에 만족해야 하고요.

  "그래도 살기에 편하기는 해요. 역시 하나를 가지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나 봐요."

  "그런 것도 알고 도사가 다 되어서 산에서 내려갔구나?"

  700 고지쯤 되는 옛 동네를 두고 도심으로 내려간 것을 언니는 참 재미있게도 말합니다.


  "봄에 뿌린 로메인이 오늘 아침에 보니 먹을 만한 크기로 자랐던데 온 김에 좀 솎아 놓고 가."

  '내가 흙도 ㅇㅇ땅에서 난 게 좋다고 해서 퍼 나르고 아침저녁으로 살피면서 농약 하나도 안 주고 정성으로 키운 거야'라는 로메인의 이력을 진실되게 말했으면 제가 손사래 칠 것을 아는 언니가 이렇게 '솎아 놓고 가'라는 말로 선수를 칩니다. 이럴 때는 못 이기는 척 쭈그리고 앉는 게 귀가 편합니다. 이제 여린 잎을 내는 고만 고만한 로메인 사이에 솎을 만한 게 있나 살핍니다. 그런데, 거참, 이 언니는 잔소리가 심하시네요.  

  "큰 것들로만 뽑아."

  "뿌리째 뽑아야 해."

  "자, 여기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가."

  이렇게 해서 언니네 점심과 저녁 어쩌면 내일 아침 식탁에 올라갈 로메인 맏물이 제게로 왔습니다.


언니에 텃밭에서 따온 로메인 맏물과 치커리 @무지개인간


  700 고지에서 오랜만에 커피를 마시고 로메인과 치커리를 들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 밝고 예쁘다는 언니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돕니다. 자주 다니던 길, 매일 보이는 상점과 표지판. 너무 익숙해서 별 느낌이 없었던 풍경도 무지갯빛 비눗방울 필터를 끼운 듯 햇빛을 받아 오색의 빛을 내는 듯합니다. 아파트 입구에서는 매일 조그만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몇 번을 마주친 적이 있지만 관심 있게 본 적은 없는데 오늘따라 산책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귀엽게 보이네요. 양면 주차로 늘 복잡한 아파트 안 도로에서 마주 오는 차를 비켜주는 마음에도 여유가 넘칩니다. 아무래도 언니가 여름에도 지치지 말고, 항상 예쁜 것만 보고 다니라며 저 몰래 여름 렌즈를 눈에 넣어둔 것 같습니다. 여름 내내 끼고 다니다가 좋으면 가을에도, 겨울에도 끼고 다녀야겠습니다.

  



  다정한 독자님, 제 글을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가 되세요~


  여름 렌즈를 끼운 요술쟁이 언니에 다른 이야기도 읽어 보세요. 제 삶의 모토 '삶을 정성껏'을 제목으로 고른 글입니다.

  (03화 삶을 정성껏 (brunch.co.kr))

 

  호랑나비 집사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작년에 쓴 호랑나비를 키운 이야기도 읽어보세요.

  (13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brunch.co.kr))


  그리고 글과는 관련이 없지만 어제 노을이 참 예뻐서 찍은 사진도 함께 올려봅니다^^

하늘이 분홍해 @무지개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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