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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May 27. 2024

난 우리가 친한 줄 알았는데

우리는 누구보다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닐지도요.


  지난주에는 (사)춘기가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춘기는 전날 밤 10시부터 짐을 싸기 시작하더니 그때부터 설레는 마음에 둥둥 떠서 연신 구름을 타고 다니듯 여유로운 춘기가 되었습니다. 신이 나서겠지요?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더니 다음 날 새벽에는 깨우지도 않았는데, 벌떡 일어나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구름 타고 가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입니다.

   Good-bye.



  춘기와 3박 4일이나 떨어져 지내면 걱정이 많을 줄 알았습니다.

  밥은 먹었니?

  밥은 맛있게 잘 나오니?

  지금 뭐 하고 있어?

  친구들과는 잘 지내고 있니?

  아픈 곳은 없니?

  옷은 갈아입었니?

  샤워는 했지?

  룸메이트가 불편하지 않게 화장실을 쓰면 뒷정리를 잘하렴.

  수건은 하루에 한 장씩 나오니 충분할 거야.

  수건이 부족하면 호텔 프런트에 이야기하렴. 비용이 나와도 괜찮아.

  호텔 카드키는 꼭 잘 챙겨야 해.

  사진도 많이 찍고, 많이 웃으며 후회 없이 놀아야 해.

  강남의 야경 사진은 꼭 찍어 보내주면 좋겠구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헬스를 하면 더 좋겠고.

  서울은 지금 덥다더라. 용돈 아끼지 말고 시원한 음료수는 꼭 사 먹어야 해.

  아프면 선생님께 바로 말씀드리고.

  양치도 잘하렴.

  엄마가 준 체크카드를 잃어버리면 꼭꼭 꼭 연락하고.

  용돈이 모자라면 이야기하고.

  동생에게 줄 선물은 꼭 사 오고.

  이렇게 많은 걱정을 닮은, 잔소리 같은 신신당부가 3박 4일 내내 오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말입니다. 3박 4일 동안, 그러니까 제주공항에서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까지 85시간 동안 춘기와 이루어진 통화는 단 1통, 고작 1분이 끝입니다.


사랑하는 춘기와 통화 내역 @무지개인간


  음, 이쯤에서 객관적으로 우리 관계를 돌아보자면 평소에 우리는 무척 친(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는 '까도남(까칠한 도시 남자)'이었던 춘기가 오히려 다정한 청소년기를 맞이한 듯 아침이면 사랑한다는 말과 따뜻한 포옹을 해줍니다. 때로는 여느 사춘기처럼 성질을 부렸다가도 "엄마, 미안해."라고 하며 먼저 다가오기도 합니다. 주말에도 가족과 함께 농구를 하거나 배드민턴을 치며 보내는 고마운 춘기입니다. 그런데 수학여행을 가서는 85시간을 무려 1분으로 '퉁'치는 능력을 보여주네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더니, 더 넓은 세상으로 가게 되면 '남'처럼 살게 될까 걱정이 됩니다. 아, 이거 참 섭섭합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아직 몇 년이 남았지만 춘기가 군대에 간다면 우리는 그 시간을 허전한 마음에 매몰되기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낼 것 같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중학교 2학년 시절의 수학여행처럼 말이지요. 생각이 더 깊어져, 눈에 담을 수 있는 것을 가능한 많이 담고 빠르게 흘러가는 지금의 시간 속에 더 많은 추억을 채워둘 줄 아는 아이, 그런 멋진 아이가 우리 춘기라는 생각이 들자 이내 섭섭한 마음이 가십니다. 아무튼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편안하게 3박 4일을 보냈어요. 때에 맞춰 독립할 준비를 잘해주는 춘기에게 고마워집니다.


  드디어 춘기가 수학여행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춘기의 모습을 궁금해하면서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습니다. 반갑다고 말해야 하는데 내심 섭섭한 마음이 남아 있었는지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았습니다.

  "넌 어쩜 연락 한 통이 없니?"

  "바빴어."

  바빴답니다.

  얼마나 바빴냐고 따져 물어보려다가 운전만 했습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온 춘기는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는 피곤했는지 바로 곯아떨어졌습니다. 춘기가 잠든 밤이 뒤에야 식탁 위에 올려둔 일정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춘기가 바빠서 연락 한 통 못하게 만든 수학여행 일정표 @무지개인간


  일정표에는 8시 30분 전까지 기상과 조식을 마치면 되는데, 바빴나 봅니다. 저녁을 먹으며 했던 6시에 일어나서 조식을 먹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일정표로 본다면 조식을 먹고 아침부터 재미있게 노느라 바빴나 봅니다. 아침을 먹으면 바로 버스를 타러 가야 해서 잘 때도 외출복을 입고 자고 눈 뜨면 바로 레스토랑으로 갔다는 춘기는 시간을 잘 쓰기 위해 노력을 한 것 같은데 정말 바빴나 봅니다. 단체로 여행을 가면 우리도 시간을 맞추느라 얼마나 바쁩니까. 춘기도 그러느라 바빴나 봅니다.


  물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저도 그때는 무척 바빴습니다. 통화목록을 봤더니 전화를 딱 한 번 했더라고요. 그 한 번의 전화가 기적적으로 연결이 되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우리는 정말 이렇게 살고 있나 봅니다.

  나중에 춘기가 말해주길 점호 시간에 지도 선생님께 핸드폰을 반납해야 해서 충전할 시간도 부족했다고 합니다. 첫날은 멋모르고 게임을 하느라 충전을 못했더니 그다음 날은 아침부터 배터리가 없어 불편을 겪었고 그 뒤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최대한 충전해서 반납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 이유가 있고 앞가림도 잘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요.

  

  춘기의 수학여행을 계기로 우리는 안전한 울타리를 확인한 것 같습니다. 물리적 거리와 연락 횟수가 우리의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게 아니었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서로 믿는 마음이 가족이라는 한 공간에 있게 했습니다. 그냥 신뢰하는 것, 그 안에서 사랑받고 있고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안전한 곳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춘기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수학여행을 가기 전날에 뒤척이던 춘기가 수학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이 되자 또 뒤척입니다. 잔다고 누운 지 1시간이 지났는데 이불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춘기야, 고민 있어?"

  춘기는 없다고 합니다. 힘든 점도 어려운 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춘기의 등에 ‘고민’이라는 글씨가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는 것 같을까요? 우리는 친한 줄 알았는데, 엄마는 언제나 춘기의 편이라는 것을 몰라주면 어떡하나 불안해집니다. 그러다가 정말 친한 사이라면 춘기가 먼저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러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친하니까, 고민이 많아 보이는 등 뒤에 대고는 "항상 사랑해. 엄마는 언제나 춘기 편이야."라고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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