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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28. 2024

귀 밝은 아이폰이 추천해 준 토마토 맥주

낮말은 아이폰이 듣고 밤말도 아이폰이 듣는다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왜냐하면 올해 유월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독서 모임을 열었는데 오늘은 일상에 독서를 끼워 넣은 경험을 만나서 나누며 아름답게 마무리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지요. 음, 요즘은 자꾸만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기에 담백하게 다시 써보자면 독서 모임 구성원들과 만나는 날이었다는 뜻입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니 이제야 다정했던 그 시간이 기다렸다는 듯이 총총 걸어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모순으로 가득 차있지만 덕분에 삶은 더 재미있고 특별해진다는 게 보입니다. 삶이 그리는 오선에 불쑥 나타난 불협화음을 받이들이며 내면을 다독이는 삶, 그 보통의 일상이 특별하다는 것을요.


저녁에 맥주 한 잔 하고...


  내 삶 속에 존재하는 모순을 찾아보는 시간에 확 꽂힌 한 마디, 그것은 '혼술'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었지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얼마나 반갑던지. 한 달 동안 같은 책을 읽었다는 동일점에 '혼술'을 한다는 공통점까지 생기니 상대방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맞장구를 치고 싶어 안달입니다. 하지만 '저도요!'라는 말을 뱉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 끄덕, 끄덕였지요. 만약 이 한 마디가 악보의 한 음절이었다면 울림을 주었을 테고 유화 물감의 강렬한 붓터치였다면 감동을 주었을 테지만, 이것이 말이나 글일 때는 되려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책을 읽다가 온 마음에 꽉 찬 기쁨을 느낄 때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멈춘 뒤 그 감동을 고요하게 새기는 것처럼 말이지요.

  

  모임이 끝나고 잠깐의 여유가 생겨 '인스타그램'에 접속했습니다. 지금 서울에서는 '국제도서전'이 열리고 있어 책과 독서에 관한 정보가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계속 올라오고 있거든요. 흥미로운 책이 뭐가 있을까 싶어 기웃거려 봅니다. 그런데 말이죠. 책 사이로 새로운 정보가 등장했어요. '토맥'이라는데 이게 뭘까요? 궁금하니까 게시물 클릭, '토마토 주스 더하기 맥주'. 이 묘한 조합에 아주 기묘한 끌림이 일어납니다. 상큼하고 경쾌한 혼술 시간이 될 거라는 신기한 느낌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한낮입니다. 그리고 밖에는 5인분 쯤 되는 제주 오겹살을 뒤집어가며 굽는 소리를 내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고, 이 비는 고기 옆에 제주막걸리와 맥주 한 잔도 차려주지만 아직 오늘 하루가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니 이 상상을 빨리 터트려야 합니다. 폭포폭.


또 엿들었어?

  제가 통화할 때마다 엿듣고는 SNS에 정보를 쫙 나열해 주며 ‘나도 같이 들었어'라고 고백하는 아이폰이 독서모임에서도 귀를 쫑긋 세우고 함께 했나 봅니다. 한 멤버가 말한 '저녁에 맥주 한 잔을 하고'라는 말을 두 귀를 가진 일곱 명의 사람과 못 말리는 기계가 함께 들었네요. 정말 못 말립니다. 덕분에 낮에 터트린 상상이 밤에 SNS를 접속하니 다시 퐁 하고 떠올랐습니다. 집에서 편의점까지는 5분 거리, 녹아내린 몸을 일으켜 옷을 바꿔 입고 얼른 다녀오면 되는데 내일까지 미룰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다녀와야지요. 토마토주스탄산이 풍부한 라거를 사러요. 만약 실행력이 '울트라 캡숑 나이스 짱'인 독자님께서 이 글을 읽고 바로 편의점으로 달려가신다면 여기까지는 읽고 가셔야 해요. 꼭, 라거를 사야 된다고 합니다. 라거. 저도 노안이 와서 작은 글씨가 잘 안 보이지만 온 힘을 다해 라거를 골라 담았어요.


  그럼 이제 만들어 볼까요? 레시피라고 말할 것도 없어요. 토마토주스와 라거를 같은 비율(1:1)로 붓기만 하면 됩니다. 잔에 토마토주스를 반만큼 따르고 그 위에 라거를 부어 잔을 채우면 되는 것이죠. 가득 흘러넘치지 않게 말이죠. 더 시원할까 싶어 얼음도 한 조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덩어리지만 아무튼 한 조각)을 넣어보았어요.


토마토주스와 맥주가 만나면? 토맥 @무지개인간


  아, 떨리는 마음.

  맛을 볼까요?

  으응? 한 모금을 더 마셔 볼게요.

  음? 토마토주스를 더 넣어볼게요.

  응? 이게 아닌가 봐요. 라거를 더 넣어볼게요.

  엥? 제 입맛에는 토마토주스를 더 넣는 게 더 낫네요.

  

  이 둘의 만남은 토마토주스가 원했던 일인지 라거가 바랐던 일인지 모르겠지만, 토마토주스는 여전히 맛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토마토주스가 라거를 꼬드겨서 만든 여름 에디션 같습니다. 끝내주게 맛있다고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레시피는 아니지만 분명 자꾸 생각이 나는 매력을 지닌 아이템은 맞습니다.

  

  아무튼 이 앙큼한 아이폰!

  낮말과 밤말을 다 엿들으며 저의 모든 생각과 말을 다 알아내려고 하더니 기어코 오늘도 아이폰의 정보력에 유혹을 당한 것 같습니다. 오늘이 정월대보름은 아니지만 귀가 밝은 아이폰이 추천해 준 '토맥'을 마시면 저도 아이폰처럼 귀가 밝아지고 눈치도 빨라질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은 금요일이니 퇴근길에 또 편의점에 들러야겠어요. 토마토주스를 사러 말이지요.

  그나저나 다정한 독자님의 휴대폰도 잘 엿듣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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