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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l 08. 2024

30년 전에 쓴 쪽지를 받았다

중고책을 샀더니

  얼마 전에는 독서 모임에서 양귀자 작가의 <모순>을 읽었습니다. 출간 후 20년이 지났지만 푸른 이끼 대신 초록의 청춘을 간직한 소설이라니,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요. 천천히 읽어주길 바란다는 작가의 당부에 아껴 읽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지?'라는 귀여운 질투도 해보았지요. 속으로는 훌륭한 작품을 같은 언어로 문화와 정서까지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에 영광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얼른 6월의 독서를 마무리 짓고 7월의 모임을 시작해야 하는데, 쉽게 보내지지 않네요.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들어 같은 작가의 책인 <부엌신>도 읽고 <희망>도 책장에 꽂아두었어요. 그 사이에는 <양귀자의 엄마노릇 마흔일곱 가지>라는 에세이를 끼워 넣을 계획입니다.


  <엄마노릇 마흔일곱 가지>는 작가가 딸을 낳고 기르며 쓴 육아 에세이입니다. 양귀자 작가의 책은 '살림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가 2013년부터는 '도서출판 쓰다'에서 개정판을 펴내고 있는데 바로 '도서출판 쓰다'의 대표가 외동딸인 심은우 님입니다. 글 쓰는 엄마와 엄마의 책을 펴내는 딸이 된 결말이 있는 에세이, 게다가 이토록 세련된 문체를 가진 작가의 육아 에세이라니! 정말 궁금했던 책인데 마침 독서모임 멤버들이 <모순>에 이어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으로 <엄마노릇 마흔일곱 가지>를 첫 번째로 뽑아주었어요. 다만 이 책은 구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열림원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현재는 절판이더라고요. 이 와중에 다른 멤버들의 것까지 주문을 받는 오지랖을 펼쳤으니 중고시장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책임을 다해야지요. 다행히 한 번의 '취소'를 겪었지만 무사히 네 권을 구했답니다.

  

<양귀자의 엄마노릇 마흔일곱 가지> 네 권의 책이 바다를 건너왔어요 @무지개인간

  

 

  네 권의 책이 모두 다른 이야기를 간직한 채 바다를 건너왔어요. 한 권씩 열어보는 순간 귀한 보물을 마주한 것처럼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경건한 마음마저 들게 되더라고요. 네 권의 책 중 한 권은 초판 발행본으로 온통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책입니다. 유능하고 능숙한 작가도 새로운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 온 정성을 다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이 함께 건너왔어요. 가능한 한 중앙에 찍기 위해 노력한 도장에도 앞으로 사랑받는 책이 되길 바라는 엄마의 기도가 고스란히 담긴 것 같고요.


    초판본의 기도가 통했나 봐요. 출간 열흘 만에 3쇄 발행이라니요! 찍힌 도장의 모양과 위치로 볼 때 요즘 밀려드는 주문에 정신이 없지만 출판사의 능숙한 직원들은 이제 눈을 감고도 정중앙에 도장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도장 찍기에 숙달된 것 같습니다. 책을 인쇄하고 도장을 찍느라 바쁜 열림원 출판사의 '브이로그(VLOG)'를 상상해 봅니다. 출간 후 약 100이 되는 날에는 6쇄가 발행되네요. 초록 칸이 그려진 원고지까지 잘라 도장을 찍습니다. 이 원고지는 어떤 쓸모를 다하고 여기에 온 건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독서의 계절인 가을에는 8쇄를 찍네요. 도대체 얼마나 찍었길래 나무 도장이 다 닳았는지 혹은 주문이 많아 도장을 하나 더 새겼는지 알 수 없지만 작가님의 도장이 바뀌었어요. 아, 정말이지 혼자 읽었다면 절대 상상도 못 할 책의 역사를 만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의 귀한 역사가 함께 도착했어요. 무려 30년 전 ‘포스트잇'에 쓴 쪽지가 책 속에 있더라고요. 먼저 '포스트잇'의 접착력에 '엄지 척'부터 보냅니다. 

다정한 마음을 가진 서명의 주인을 찾습니다 @무지개인간


  거의 30년 전에 쓴 쪽지가 빛바랜 흔적도 없이 마치 어제 쓴 글처럼 남겨져있네요. 책 사이에 놓여 있었던 시간만큼 푹 익은 감동과 낭만이 몰려옵니다. 모르는 사람 A가 모르는 사람 B에게 남긴 쪽지가 어떻게 제 품에 오게 되었는지... 이건 분명 삶이 우연으로 엮은 인연이 온 것입니다. 아이들 키우시느라 바빴던 1995년 마흔 살이었던 엄마가 타임머신에 실어둔 편지를 2024년 장미의 계절을 보내고 있는 사십 대의 제가 받은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 다정한 마음을 보낸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요?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등잔 밑이 어두울 수 있으니 일단 가까운 사람부터, 아빠를 떠올려보았어요. 음,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돌려 보아도 제 아버지는 절대 아니네요. 아빠의 글씨체도 아니지만 아빠의 이니셜은 더더욱 아니거든요. 그래도 아빠가 엄마에게 남긴 연애편지 같은 쪽지가 엄마가 된 딸에게 왔다면-그것도 중고책으로 우연히 말이죠- 얼마나 영화 같은 일일까요? 이건 진짜 멋진 글감이네요. 이 쪽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찾는 일보다 글을 쓸 소재를 놓치지 않기로 합니다. 그래서 '즉흥파'인 저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즉시 마음을 먹었지요. 


  소설에서는 '클라이맥스'가 있지 않습니까? 가장 극적인 만남, 반전의 결말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김이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원래 주인은 시어머니라는 설정이 떠올랐거든요. 그러니까 이 고상하고 교양이 넘치는 쪽지를 받은 사람이 시어머니라는 것이죠. 시간이 흘러 책장 안에서 녹슨 책은 중고 도서 시장으로 나오게 되었고, 결국 절판된 도서를 구하는 며느리의 책장에 시어머니의 책이 오게 되었다는 상상. 책 한 권으로 같은 점이 또 하나 그려지며 (아무튼) 해피엔딩. 음, 아직 쪽지를 쓴 사람을 그려내지 못했지만 일단 창작을 위한 상상은 고이 접어 둘게요.


  이제 서명의 이니셜부터 판독해 보아야겠어요. 다정한 독자님의 눈에는 이니셜이 어떻게 보이시나요? 후보 이름을 추측해 보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혹시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님의 부모님 필체와 서명이라고 생각된다면 꼭 댓글을 남겨주세요. 이렇게 외치면서요.


이 서명은 제 어머니(아버지)가 확실합니다.


  영화 같은 일이 현실이 된다면 30년 전의 특별한 추억을 돌려드리고 싶어요. 

  "선물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지금 이 귀한 쪽지는 저에게 필요한 응원이 되어 잠시 저와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날이 오길, 이 글에 소원을 담아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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