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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Oct 18. 2022

매일 쓰기의 힘

우울증과 멀어지기

  임신을 했다. 뱃속 생명체와 태동으로 안녕을 주고받으니 마치 작은 우주를 품은 것 같았다. 나는 곧 작고 소중한 생명을 세상에 낳을 것이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이 작은 우주는 시간을 쌓아가며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갈 것이다. 한 세상을 낳아 내가 엄마가 되었다. 끊어진 탯줄보다 더 깊은 모성애는 이제 아이와 나를 연결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은 후 만나는 세상은 갑자기 모든 게 낯설었다. 아이를 낳고 2박 3일 만에 퇴원을 하고 유행하던 조리원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집으로 와 끝없는 독박 육아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24시간 불이 켜진 초보 엄마의 삶은 몸을 지치게 했지만, 더 힘든 것은 마음의 고통이었다. 산후우울증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이었다. 우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을 덮치고 있어서 알아차리기가 힘들었다. 남편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감정을 쏟아내는 것보다 정서적 고립을 선택하며 '괜찮은 척, 잘 지내는 척' 연기를 했다. 결혼, 출산, 육아가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고, 책임감만큼의 지식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라고 누군가 말해줬다면 괜찮았을까. 


  처음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생명을 낳은 대단한 일에 어울리는 정성을 쏟고 싶었다. 그래서 서랍 구석에 있던 오래된 공책에 식사 때마다 먹은 음식을 기록했다. 혹시 내가 먹은 음식이 아이에게 알레르기나 설사를 일으키지 않을까 싶어 작은 과자 부스러기라도 입에 들어간 것은 모두 기록했다. 커피는 물론 고춧가루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것은 참았다. 그러던 어느 날, 모두 잠든 깜깜한 밤이 되면 달의 그림자를 싣고 가는 구름이 된 듯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나는 누구인가


  알 수 없었다. 어제의 나는 더 이상 오늘의 내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는 피와 살을 나눈 목숨처럼 소중히 지키고 싶은 아이가 하나 생겼다. 그리고 어서 예쁜 옷을 입고 회사로 돌아가 해내고 싶은 일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생각하기보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머리와 내 팔꿈치 정도쯤 오는 키에 고작 3kg로 세상에 나온, 작은 생명에게 시간을 맞춰 수유를 해야 하고, 모유량을 늘리기 위해 억지로라도 챙겨 먹어야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나는 사람인가, 모유를 만드는 공장인가

  오로지 생산만을 위해 돌아가는 하루 속에서 이러다 '나'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본능은 나를 살게 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느 날 식사를 기록하던 공책에 그날의 기분을 적어 보았다. 누군가 몰래 본다면 대놓고 '디스(disrespect, 무례)'라고 상처받을까 싶어 꾹 눌러둔 일들을 하나씩 적어보았다. 나는 떳떳하니까 몰래 봐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편하게, 쓰고 싶은 마음을 적었다. 울고 싶은 날에는 울면서 적고, 화가 나는 날에는 갈기듯 휘날리는 글씨로 적어 내렸다. 대궐 밖 신문고를 울릴 정도의 일부터 기록하기 시작했다.

남편에게는 아이를 봐줄 테니 복직하라고 했지만 따로 전화를 주셔서  '체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된다.'며 친정 부모님과 상의해서 결정하라고 하심 (2010.8.12)

  한두 줄의 기록이지만 서랍 속 낡은 노트는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언제나 나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받아준 덕에 처음에는 회색빛이던 노트가 점점 색을 찾고 빛으로 번지고 있었다.


  첫 아이를 낳고 내가 산후우울증이 있었다는 알아차린 것은 시간이 더 흘러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단어들로 말을 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낳고 왜 예쁜 줄 몰랐을까.'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힘들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순간, 서랍 속 노트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흙으로 돌아갔다. 나는 운이 좋게 오래된 새 노트와 연필 하나로 다시 나답게 사는 법을 배웠다. 쓰기의 힘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지만 '쓰는 삶'은 나의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좋은 생각을 채우며 단풍의 계절을 기록해봐야겠다.    


2022.10.18 제주도립미술관


  가을이 되니 단풍만 물드는 줄 알았는데, 저도 '쓰는 사람'으로 물들고 싶더라고요.

  스스로는 2022년 9월부터 계속 쓰는 재미를 알게 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아주 오래된 쓰기의 흔적을 찾았어요. 정말 나를 살린 글쓰기를 했더라고요.

  혹시 독자님께서도 조금 힘든 마음을 담고 계신다면 글로 용기를 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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