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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런 삶

잊고 살았다

by 혼란스러워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은 어제부터 방학이라 기분이 한 껏 좋아 보였다. 나도 어릴 땐 방학을 기다리곤 했고 개학이 다가오면 마음이 괴롭기도 했으니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완전한 자유를 맞은 녀석은 백수 건달이 따로 없어 보인다. 지난봄에 다니던 영어 수학 학원을 쉬고 싶다고 하여 그러라고 했다. 억지로 공부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집에서 책도 읽고 자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해 보라고 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역시나.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사용 시간만 늘어났다. 이래도 될까 싶었지만 지켜보기로 했다.


요즘 아들이 그나마 다니는 건 야구 학원이다. 도무지 좋아하는 게 없어 보이던 녀석이 야구에는 흥미를 보여 근처 야구 학원에 보냈다. 학원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수강생이 많지 않아서 감독님이 적극적으로 상담도 해주고 등록을 받아 주셨다. 난 아이가 좀 소심한 편이니 야구에라도 흥미를 붙여서 운동도 하고 사회성도 좋아지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감독님도 비슷한 나이대 아이를 키우는데 역시나 소심한 성격이라 잘 이해한다고 하시면서 잘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야구 학원을 다닌 지 3개월 째다. 학원이라기보다 연습장이라고 해야 맞다. 타격과 투구를 가르쳐 주고 연습하는 실내 연습장이다. 오늘 감독님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내일 근처 야구장에서 연습 게임을 하니 아이를 시간 맞춰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아들에게 전화를 하니 받지 않아서 메신저로 이런 메시지를 받았고 답장을 해드려야 한다고 하니 가지 않겠다고 한다. 왜 안 가냐고 하니 "피곤" 두 글자만 남기고 끝. 일단 화내지 말고 침착하자고 마음먹고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은데 가지 그러냐."라고 말했다.


도무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려는 의지나 근성이 없는 이 녀석을 어찌해야 할까. 방학인데 학원도 안 다니고, 일주일에 두 번 가는 야구 연습마저 피곤하고 컨디션 안 좋다는 이유로 자주 빠지니 부모로서 참 답답한 지경이다. 뭘 억지로 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방학인데 집에만 있으면 분명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을 테고 그렇게 방치해도 되나 싶다. 다르게 생각하면 방학인데 뭐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집에만 박혀 있는 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며칠 전에 친구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고양이를 세 마리나 키우는 친구다. 내가 아들 고양이 알레르기 문제로 고민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던 중에 그 친구가 갑자기 "부럽다."라고 했다. 뭐가 부럽냐고 하니 아들과 고양이를 키우며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는 게 부럽다는 거였다. 난 아차 싶었다. 그 친구는 자식이 없다. 나에겐 문제점 투성이인 아들 녀석이지만 누군가는 또 이런 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부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못했다. 친구의 그 부럽다는 한 마디가 나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었다.


현재 상태 만으로도 난 많은 것을 누리고 있고, 그 모든 것이 복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 나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어떤 것도 그 자체로 감사의 대상이라는 것 또한 잊고 살았다. 세상만사가 그렇다.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 가지면 둘을 갖고 싶은 게 인간 욕심이다. 아들을 주고 키우며 살 수 있는 복을 받았으면 됐지 뭐든 잘하고, 친구도 잘 사귀고 그런 아들을 또 원하고 있다. 그래 감사하자. 아들 녀석 행동에 때로 화도 나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일단 존재 자체로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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