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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혼란스러워 Jan 16. 2023

겨울단상

겨울날의 추억

1월 중순 한 겨울이다.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졌고 주말 사이 흰 눈이 내렸다. 요즘 도시에서는 겨울에도 눈을 보기가 어렵다. 어릴 적 겨울에 눈이 소복이 쌓인 날이 많았다. 겨울 방학 내내 눈 사람 만들고, 눈 싸움하고 냇가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며 놀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마당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고 동네 길에 사람 다닐 길을 내었다. 처마 밑에 맺힌 고드름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중 큰 것을 따서 아이스크림처럼 입에 넣고 먹어 보기도 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면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눈에선 눈 냄새가 났다. 향기는 아니지만 투명한 냄새가 났다. 비 냄새 보단 깨끗한 느낌이었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동네 강아지들은 코에 눈을 묻히며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아침을 먹고 쓸다 만 눈을 마저 쓸고 들판에 나가 눈 사람을 만들었다. 눈 덩이를 굴리다 보면 어느새 내 키보다 커져서 더 이상 굴리기 어려웠다. 그러면 작은 눈덩이를 만들어 눈 사람을 만들거나 눈덩이 안을 삽으로 파서 이글루를 만들었다. 파낸 눈을 겉에 덧붙여 가며 만들다 보면 이글루가 집채만 하게 커졌다. 날씨가 추울 때 이글루에 물을 뿌려 놓으면 꽁꽁 얼어서 더 단단해졌다. 그 집은 며칠 동안 녹지 않고 우리 놀이터가 되어 주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By. Nicky ❤️���❤️



냇가에 나가면 물이 꽝꽝 얼어서 썰매장이 만들어졌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 작은 돌을 가지고 아이스하키 놀이를 하기도 하고, 썰매를 타기도 했다. 구멍을 뚫어서 얼음낚시도 하곤 했는데 구멍을 뚫다가 신발이고 장갑이 젖어 버리면 냇가에 모닥불을 피워 말리곤 했다. 간혹 얼음이 얇은 곳에서 쿵쿵 뛰면 얼음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썰매는 직접 만들었다. 아직 썰매를 직접 만들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형들이 만들어 주었다. 나무로 된 사과 박스를 뜯어서 상판을 만들고 소나무를 잘라서 밑받침을 만든 뒤 굵은 철사를 대어 날을 만들었다. 손잡이는 소나무 윗부분 얇은 부분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만들었는데 끝부분엔 긴 못을 박아서 얼음을 딛고 썰매를 밀어낼 수 있도록 했고, 손잡이 부분은 막대를 짧게 잘라 가로로 대어 손으로 쥐기 쉽게 만들었다.


썰매를 들고 이동할 땐 썰매 상판 윗부분에 작은 구멍 두 개를 내어 손잡이에 달린 못으로 찌른 뒤 어깨에 들쳐 매면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키 큰 형들은 썰매를 선채로 쌩쌩 달렸고 작은 아이들은 무릎을 꿇고 탔다. 썰매로 빨리 가기 시합을 하기도 하고, 큰 아이들이 작은 아이들을 태우고 끌어 주기도 했다. 한 겨울 이보다 더 신나는 놀이는 없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by. Couleur



소나무를 잘라서 팽이를 만들기도 했다. 손가락 길이만큼 잘라서 몽당연필처럼 뾰족하게 깎은 후 끝에 쇠구슬을 박으면 훌륭한 팽이가 됐다. 솜씨 좋은 형들은 팽이 윗부분에 형형색색 색깔을 칠했고, 그 팽이가 팽팽 돌아갈 땐 무지개가 그려지기도 했다. 팽이채에 달린 끈은 오래된 운동화 끈을 많이 썼다.


연날리기는 나의 주특기였다. 대나무를 잘라서 연살을 깎고, 한지를 오려서 밥풀을 발라 붙이고 적당히 구부려 연실로 묶은 후 방패연을 만들었다. 당시 '얼래'라고 부르는 실타래가 있었는데 소나무로 만들었다. 연실 10 타래 정도 감아 놓으면 내가 날린 연이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오르곤 했다. 햇살 따듯한 겨울 오후에 양지바른 둑에 몸을 기댄 채 하늘 높이 떠 있는 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른함이 몰려오곤 했다.


대나무로 활을 만들어 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사냥이라곤 했지만 동물을 잡는 건 어려웠다. 정확도도 떨어질뿐더러 동물을 발견한다 해도 이미 저 멀리 달아난 뒤였다. 그냥 활을 들고 눈 쌓인 산을 돌아다니는 것을 즐긴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가 누런 콧물이 되어 코로 나왔다. 소매 끝자락은 늘 콧물 닦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대개는 밖에서 놀았지만 군불 땐 사랑방 아랫목에 담요를 펴고 모여 앉아 놀기도 했다. 찐 고구마와 살얼음 떠 있는 동치미, 살짝 얼은 홍시 등은 겨울철 별미였다. 어른들이 모여 두부를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와 방금 꺼낸 김장김치를 싸 주셨다. 땅에 묻은 독에서 꺼낸 김장 김치는 손으로 찢어 먹으면 더 맛있었다.


한 겨울 시골의 겨울 해는 짧았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집집마다 굴뚝에선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군불을 때고 밥을 짓는 연기였다. 집집마다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고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군불  땐 아궁이에 걸린 가마솥에 데운 물로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하루종일 추운 밖에서 노느라 손이 갈라지고 터졌는데 뜨거운 물에 담그고 한참 있다가 때를 밀어내면 개운했다.


2023년, 도시에서 겨울을 또 보낸다.

눈이 내려도 오래가지 않는다.

이 겨울은 그다지 기억날 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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