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셔준 게 문제?
“참! 소개팅 어땠어?”
옆 팀 황대리가 지난 금요일에 오랜만에 소개팅을 하나며 퇴근 시간 임박해서 거울을 보며 한껏 치장하고 나갔던 모습이 생각나서 잘 됐는지 물었다.
“완전 망했어요. 최악이었어요.”
친한 친구가 소개해 줬고 괜찮아 보여서 잔뜩 기대하고 나가던 모습이 눈에 선했기에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그 친구는 물어봐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소개팅 망한 썰’을 풀어놓았다.
사연은 이랬다.
소개팅하기로 한 날 약속 시간인 6시 30분에 맞춰 나갔는데 10분 늦게 도착한 그 남자, 멀리서 어정쩡한 자세로 뛰어 오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저 남자만 아니어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이 뜻대로 되던가. 제발 아니길 바랐던 그 남자가 다가오며 “혹시.. 황 OO 씨?”.
일단 적당한 가게를 찾아 들어간 남녀는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남자는 술 한잔 같이 해도 괜찮냐고 물었고, 황대리는 주량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술 한 잔 해봐야 사람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평소 지론도 있었기에 좋다고 했다. 둘은 저녁을 먹으며 소주 세병을 나눠 마셨다.
남자는 술이 강해 보이진 않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적당히 마시라고 말했다. 자신은 원래 술을 급하게 마시는 체질이니 나에게 맞추지 말고 천천히 드셔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술을 더 급하게 마시더니 오히려 여자에게 취한 것 같으니 조금만 마시라고 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같이 노래방 가서 한 잔 더하실래요?” 2차로 한 잔 더하자고 제안했다. 여자는 어떻게든 자리를 끝내고 집에 가려고 생각하던 차에 황당했다. “아뇨 피곤해서요. 그만 마실래요.” 여자는 거절했다. 친한 친구 소개팅이라 더 이상 매몰차게는 하지 못했다.
자리가 파하고 집에 들어가려 하는데 남자가 자꾸 데려다준다고 했다. 약속 장소가 여자가 사는 집 근처여서 걸어가도 되는 거리였다. 여자는 부담스러웠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데려다준다고 해도 초면에는 부담스러워 거절할 판인데,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가 집까지 데려다준다니, 이 남자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거절하고 헤어지려고 하던 차에 문제의 발언이 터졌다.
“황ㅇㅇ 씨 혹시 오늘 저하고 같이 있으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 네?, 무슨 뜻이죠? 지금 실수하시는 거 아시고 그런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오늘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여자는 머리가 띵했다. 이건 무슨 상황인가.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왜 이런 생각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같이 있을 생각 전혀 없고요. 연락하지 마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친구 소개로 만나는 사람한테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도 되는 건지 다시는 소개팅 따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아이고, 이상한 사람이네. 친구 소개팅이라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술이 취했나.?”
“아무리 술이 취해도 그렇죠, 그리고 소개팅 자리에서 자기 주량 못 챙기는 사람은 이미 꽝인 거예요.”
“그러게, 오랜만에 기대하고 나갔는데 속상했겠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황대리 또래 남자 직원이 한 마디 거들었다.
“같이 술 마셔 줘서 그래.”
같이 술 마셔 주니까 만만하게 보고 그랬다는 말인데, 같이 술 마신 여자가 문제라는 뜻으로 들릴 수 있는 문제적 발언이었다. 그 직원도 말이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갔다.
같이 술 마셔줘서 그렇다니, 그런 황당한 논리가 어디 있나. 같이 술 마셔주면 언제든 선 넘어 보려 시도하는 건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그게 남자건 여자건 똑같다. 그냥 선 넘은 그 사람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