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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런 삶

오이냉국

여름철 별미

by 혼란스러워

어제는 너무 더워서 입맛도 사라졌다. 점심시간, 밖을 내다보곤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무실 주변 골목엔 땡볕으로 달궈진 아스팔트와 차들, 실외기가 내뿜는 후끈한 바람을 피해 손차양을 하거나 양산을 쓴 사람들이 식당을 찾아 이동하고 있었다. 시원한 사무실에서 점심시간이라도 쉬는 게 밥 먹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밥을 안 먹으면 긴 오후 시간을 버티기 힘드니 억지로 나섰다.


회사가 운영하는 작은 구내식당에 이미 몇몇 직원들이 와서 법을 먹고 있었다. 밥을 뜨고 국그릇을 보니 오이냉국이었다. 맑은 물에 시원해 보이는 얼음, 미역과 송송 채 썬 오이가 가득한 국통에 붉은 고추가 예쁘게 떠다녔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였다. 미역과 오이, 고추가 많이 들어가도록 국자로 휘휘 저어 한 그릇 가득 떠왔다. 시원하고 새콤한 맛, 오늘 같이 무더운 여름날 제격이다. 오이냉국은 여름이면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메뉴다.


옆에 앉은 30대 초반 직원을 보니 국을 아예 떠오지 않았다. 그 친구 입맛엔 오이냉국은 맞지 않나 보다. 어릴 때 입맛이 평생 입맛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며 오이와 미역을 한 숟가락 떠서 우걱우걱 씹었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냉국을 음미했다. 시원한 냉국 국물이 식도를 타고 위까지 내려가며 속을 식혀 줬다. 이런 별미가 또 있을까.


생각해 보니 엄마는 계절에 따라 시의적절한 메뉴를 잘도 만드셨다. 우뭇가사리 냉채, 콩국수, 오이지무침, 짠지무침이나 냉국도 여름 별미였다. 입맛 없는 더운 여름에 특별한 양념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시원하면서도 밥과 조화가 잘 맞아서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우기 좋은 반찬들이었다.


텃밭 구석에 심은 가지가 열리면 두세 개 따서 밥솥에 쪄내서 양념을 넣고 무치면 그 또한 여름철 반찬으로 제격이었다. 무더위가 절정에 이를 때쯤 늙은 오이 무침은 또 어떤가. 아삭아삭하면서도 말랑말랑한 식감과 시원한 맛을 주는 늙은 오이를 굵게 채 썰어 갖은양념에 버무리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여름엔 뭐니 뭐니 해도 열무김치다. 연한 열무에 물고추 갈아서 국물 자작 자작하게 담근 열무김치는 고추장 한 숟가락 넣고 들기름 넣고 비벼서 먹다 보면 배부른 줄 모르고 계속 먹게 된다. 밭 구석이나 논두렁에 심은 호박 넝쿨에 꽃이 피고 호박이 열릴 때쯤이면 연한 호박잎을 밥솥에 쪄서 양념된장 얹어서 밥 싸 먹던 맛도 잊을 수 없다.


장마철, 비가 내리면 애호박을 따서 밀가루에 풋고추, 홍고추 썰어 넣고 반죽해서 부침개를 해주셨는데 밀가루 음식이 유독 비 오는 날에 맛있는 이유는 뭘까. 햇감자를 넣고 큼직큼직하게 떼 넣어 만든 수제비와 엄마가 직접 밀어서 썰어 만든 칼국수 또한 별미였다. 여름엔 시원한 음식은 시원해서 좋고, 뜨거운 음식은 이열치열 뜨겁지만 시원했다.


여름이면 어른들은 입맛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입맛 돋우는 음식이 많았다. 너무 더워서 힘들지만,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입맛 낼 수 있는 여름 별미를 만들어 먹어야겠다. 엄마 손맛은 안 나겠지만 흉내라도 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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