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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런 삶

아지트

공허함을 접선했던 곳

by 혼란스러워

내가 일하는 사무실이 있는 건물 2층엔 당구장이 있다. 출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60대 이상 어른 들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당구를 잘 안치니 손님 연령대가 높아진 것이다. 삼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당구는 특히 남성들에게 인기 있는 오락이자 취미였다. 그래서 당구장에 모여 내기를 하고 노는 게 일상이었다. 당구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당시엔 고등학생이 당구장 가는 건 약간 일탈이었다. 일단 돈이 들고 당구장에가면 대부분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구장에 가서 노는 건 무리 지어 다니길 좋아하던 청춘에겐 끊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대학교에 가서도 당구를 많이 쳤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로 인해 찾아온 무기력을 당구장은 잘 받아 주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 후 복학생들 위주로 잘 가던 당구장이 있다. 이름이 ‘대학 당구장’이었는데 당구장 분위기가 우리가 편히 쉬고 놀기에 좋았고, 사장님도 친절했다. 늦게까지 당구를 치는 날이면 사모님이 라면도 끓여 줘서 우리에게 인기가 좋았다.


우리가 매상을 얼마나 많이 올려줬는지 어느 날 사장님이 당구장에 자주 오는 멤버뿐만 아니라 우리 과 같은 학년 학생을 모아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 옛날 신선놀음이 그랬을까.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몇 시간이고 당구를 쳤다.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공부를 하다가도 당구장에 한 번 오면 나갈 줄을 몰랐다. 심지어 시험 기간엔 당구장에서 책을 들고 공부를 하며 놀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험 시간이 되면 학교에 가서 시험 보고 와서 또 당구를 치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좋은 시절에 왜 그렇게 살았나 모르겠지만 그땐 그 당구장이 최고의 아지트였다. 아지트는 원래 공작원들이 비밀 작전을 위해 접선하던 장소를 일컫는 말이었다. 우린 무엇을 위해 당구장에 접선했을까. 당구장에 오면 즐겁고 재미있으니까 모였을 것이다. 공허함을 채우지 못한 청춘들이 모여 서로에게 위안을 주던 곳이 아니었을까. 그때 그 당구장에 모여 서로의 공허함을 접선하던 친구들과 형과 후배들 모두 잘 살고 있을까. 조금만 더 일하고 은퇴 후 아지트로 다들 모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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