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가 소멸하다
난 1970년대 중반에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때만 해도 5~60년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마을에 초가집도 있었으니 그 시절이 참 까마득하기만 하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마을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집집마다 TV와 전화가 생겼다. 탈수기가 생기더니 세탁기가 생겼고, 아궁이에서 연탄보일러로, 석유곤로에서 가스레인지로 바뀌었다.
컴퓨터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에 도스 프로그램 언어를 배울 때였다. 대학에 입학한 94년도에도 리포트를 수기로 쓰는 경우도 많았다. 교양 과목으로 컴퓨터 활용을 신청해서 배웠으나 철저한 문과였던 나에게 어렵기만 했다. 군대 제대 후 복학하니 인터넷으로 세계가 연결되었고, 학교 근처엔 PC방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학생들은 모두 삐삐를 차고 다녔고, 일이 년 후엔 모두 휴대폰을 들고 다녔다. 서른이 넘어가니 세계는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었고 지금은 AI 시대다.
이렇게 빠른 변화를 겪은 세대가 또 있을까. 조선시대만 해도 평생을 살아도 변하는 건 거의 없었을 테니 먼 옛날 철학자가 많았던 것도 이해할만하다. 밥 먹고 생각하는 것 외에 할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아무튼 이렇게 빠르게 변하고 발전하는 시대를 살다 보니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차분하게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나 할까. 우물쭈물, 어영부영하다간 이렇게 미친 듯 빠른 속도에 편승해 살다가 그냥 죽겠는걸. 어릴 땐 참 동화 같은 시대였다면 지금은 영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봄이면 풀꽃이 만발한 논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나비와 꿀벌이 풀꽃 위를 날아다녔다. 모내기 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로 돌아가며 집집마다 모를 심었고, 모를 심는 집에선 푸짐한 밥과 반찬을 차려 일꾼들과 동네 아이들이 모여 앉아 같이 밥을 먹었다. 그때 들판에서 먹던 그 밥맛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여름이면 개울에서 미역을 감으며 놀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어느 도랑을 뒤져도 물고기가 바글거렸다. 참새떼는 소나무에서 지절대다가 전깃줄로 날아올라 줄지어 앉기도 하며 시끄럽게 놀았다. 강남 갔던 제비는 집집마다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새끼들에게 연신 벌레를 물어다 주었다. 사람들은 제비를 내치지 않고 제비집 밑에 똥 받침대를 만들어 주어 편하게 새끼를 키우고 떠날 수 있도록 해줬다. 요즘 인구 소멸, 지방 소멸이란 말을 많이들 한다. 소멸하는 것이 어찌 인구와 지방뿐일까. 그 많던 참새와 제비, 물고기, 나비와 꿀벌도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소멸해 간다. 동화 같던 풍경이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