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무실은 한갓진 시골동네에 있다
역사인물의 생가가 관내에 있는 건 처음 알았다.
발령 이후 처음 점심시간에 밥다운 밥(돈가스)을 먹고, 꽃구경할 마음으로 산책을 나갔다. 3킬로 거리에 있는 저수지 쪽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끝까지 가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중간에 다시 돌아올 계산으로 길을 나섰다.
중간에 이정표를 보니 OOO의 생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적지에 워낙 관심이 많은 터라, 고양이가 음식쓰레기통을 지나치지 못하듯(그냥 지나치는 애들도 있겠지만)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직 4월 초순인데 한낮의 햇빛은 눈부시고 덥게 느껴졌다. 선글라스 생각이 간절했다.
1킬로도 채 걷지 않아 그곳에 당도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집이었다. 앞에 그분의 기념관이 있기도 했지만, 사적지라기엔 규모가 작은 게 사실이었다.
입구 쪽에 할아버지 한 분이 왔다 갔다 하고 있어서 관리인이겠거니 했다.
솔직히 멀리서 이곳만 보러 온다 그러면 말릴 것 같다(다른 곳도 방문 예정이면 괜찮음). 그래도 옛집을 잠시나마 둘러보니 그 고즈넉함에 맘이 편해졌다.
OOO 선생님은 아마도 부자셨나 보다. 어느 민속마을에서 조선시대 서민의 집을 본 적이 있다. 잠자기도 어려워 보일 만큼 좁은 곳도 있었는데, 이 집은 사대부 집처럼 으리으리한 저택은 아니어도 방이 꽤 널찍했다.
대청마루 같은 곳에 책꽂이가 있어서 전시품인가 하고 가까이 갔더니, 현대의 도서였고 읽지 말라거나 손대지 말라는 경고문구는 없었다. 뭐가 됐든 책을 손에 부여잡고 냄새 맡는 취미가 있는 나여서 마루에 앉아 책의 제목들을 훑었다.
항일아리랑, 이라는 제목만 확실히 기억나고 나머지는 유엔군의 한국전쟁 참전이라든가, 화성의 독립운동, 518 민주항쟁 기록물 같은 역사서적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의 한 권을 골라 읽고 있는데 관리인 할아버지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여기서 일하는 분이세요?"
"네? 아니요, 저는 그냥 방문객인데..."
"아, 저 방에 항상 상주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오늘은 안 보이네요. 이 근처에 사십니까?"
낯선 이와의 대화가 썩 즐겁지 않은 나는 적당 적당히 대답하였다. 할아버지는 알고 보니 관리인이 아니었다.
"작년부터 이곳에 오고 있어요. 올해는 벚꽃 보러 왔는데, 거의 져버렸네요."
왜 하필 벚꽃 보러 오신 날이 내가 처음으로 나들이한 날일까?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품고 있는 책을 보고 물으셨다.
"책을 좋아하시나 봐요."
나는 질문이 아닌 그 물음을 항상 좋아한다. 책을 좋아하나 보네 라는 말.
"네, 책을 좋아해서... 여기 이것저것 있어서 보고 있었어요."
"오, 그러시면 제가 책 한 권 드릴까요? 제가 쓴 시집인데, 시도 좋아하신다면 드릴게요."
"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일부러 주실 필요는 없어요."
"많이 가지고 있어요. 바로 저기 차에 있어요. 한 권 드릴게요."
"아, 받아도 되나..."
"같이 가시죠."
그렇게 나는 책을 받으러 할아버지와 주차장으로 갔다. 할아버지의 차량번호는 공교롭게도 우리 가족(나 빼고)의 휴대폰번호 공통 뒷자리였다. 이런 신기한 일이.
주차장으로 가면서 할아버지는 또다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나는 가끔씩 아아~ 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는 늦게 등단한 시인이었어요. 나는 원래 공대 출신이라, 사람들이 시 쓰는 것을 보면 밥 먹고 왜 저런 맥없는 짓을 하는가, 했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해에 3개월 간 시를 200편 정도 썼어요.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막 썼죠. 그걸 여동생이 어머니한테 보여준 모양이에요. 어머니가, 얘가 시를 썼다고? 얘는, 이게 무슨 시야!라고 하셨대요. 아마 어머니가 돌팔이였던 모양이죠?(껄껄) 그 시로 나도 등단했으니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차에서 노란 봉투에 담긴 시집을 꺼내서 안쪽 표지를 펼치더니, 조금 부끄러운 듯이 물으셨다.
"사인해 드릴까요?"
필요 없다고 하려다가, 자식 같은 귀한 시집을 낯선 이에게 넘겨주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고마워서 사인해 달라고 했다. 김두현 시인님.
"어머니가 남긴 시에, 제가 응답하는 형식으로 쓴 거예요. 주위 사람들에게 이 책을 나눠주고 있어요. 저랑 어머니의 시도 알리고요."
"이 귀한 것을... 감사합니다. 잘 읽을게요."
오늘은 나도 할아버지의 그 주위 사람들에 포함되는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여든 정도 되어 보였으니,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살아계시면 적어도 100세는 되셨을 것 같다. 그 역사를 사신 분들의 시라니, 그 깊이는 어떨까? 싶다.
흔히 노년이라 하는 인생의 황혼기에 등단하고, 시집을 내고... 꿈을 품고 꿈을 좇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는 건 없다고도 느꼈다.
책을 안고 사무실 들어가는 길에 잠깐 편의점에 들렀다가, 편의점 앞을 지키고 있던 길냥이에게 인사하고 복귀했다. 시집은 시간을 두고 차근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