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나의 상황
우울증 약 먹은 지 만 8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나는 조금은 변했을까.
먼저 요즘의 나를 말하자면, 굉장히 느슨해졌고, 딱히 아무 생각이 없으며, 조금은 긍정적이게 되었다고 생각이 들만한 정도는 된 것 같다.
바꿔 말하면 이전의 나는 스스로에게 굉장히 빡빡하고 엄격했다. 뭘 하지 않거나 혹은 쉬고 있으면 너무나도 불안했다. 그 시간들이 내 목을 죄어드는 것처럼. 또 내 머릿속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온갖 생각, 즉 잡념으로 넘쳐났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및 사유하는 방식은 그 각도가 매우 편협하여 비관(悲觀)에 치우쳐 있었다. 그 밖으로 각도를 넓히는 게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그러하다는 것은 입원 중일 때 간호사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바뀌기란 쉽지 않았었다.)
이런 나의 변화에 대한 생각이 문득 든 건 불과 몇 주 안 됐다.
여느 때처럼 자기 전 약을 먹다가, '난 이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 할까'라든가, '이젠 전과 같지 않은데 약을 끊어도 상관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내가 이런 변화를 진정한 변화, 즉 완치라고 판단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기엔 그저 이전보다는 약간 더 차분하고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 별 생각이 없을 뿐으로, 기분이 유독 좋지도, 활력이 샘솟는 것도 아니다. 날씨로 치자면 이따금 한 점 바람이 불어오는, 구름이 조금 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어느 늦봄 같다. 어쩌면 그런 류의 가을날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모양새는 아니다. 어떤 열(熱)한 정(情)이나 의지, 욕구 같은 건 '사그라졌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하루 목표한 것, 예를 들면 달리기, 홈트 등을 꾸준히 해나가는 나 자신에게 자그마한 희망을 보곤 한다.
얼마 전 회사에서 시행하는 정신건강 (자가) 진단을 해보았다. 5년 전인가, 동일한 검사를 했었는데 그 결과에 따라 나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의무 상담을 받았었다. 이후에도 향후 몇 년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올해도 같은 검사 이벤트(생각보다 참여율이 저조한 듯)로, 진단 참여 시 추첨으로 커피 쿠폰을 준다고 하고, 스스로도 치료 후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하여 해보았다.
다음 항목은, 내가 작년(또는 그 이전)에 읽자마자 '매우 그렇다'라고 대답했던 항목들이다.
31. 평소에 즐겼던 것들에 더 이상 흥미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33. 지속적으로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44. 나는 별 일이 아닌데도 걱정을 심하게 하는 편이다.
45. 불안하다고 느낀다.
46. 쉽게 긴장한다.
47.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51. 요즘 잠들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56. 내 자신이 실패자로 여겨진다.
57.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소용없다고 느껴졌다.
58.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도 만족스럽지 않다.
75. 자살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도 있다.
78. 죽고 싶을 때가 있다.
또 아래의 항목들은, 역시 과거의 내가 '전혀 아니다'라고 응답한 것들.
26. 살면서 이룬 것들을 생각하면 흐뭇하다.
27. 내 삶은 만족스럽다.
29. 내가 이루어 온 것들이 만족스럽다.
30. 내 삶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68. 나는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
71. 나는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92. 내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지난 응답을 지금껏 기억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자의 항목들(매우 그렇다)의 경우, 나는 지문을 읽고 '이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까?'라고 생각했었고, 후자의 항목들(전혀 아니다)의 경우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라고 생각했었다.
매우 그런 것이, 혹은 전혀 아닌 것이 당연했던 나의 세계관.
올해, 지금의 나의 응답은 전과 같지 않았고, 자가진단 결과도 저위험군. 처음 보는 결과다. 저위험군. 정상입니다.
이건 내가 나에게 해준 적이 없는 말인데, 나 자신은 전보다 나아졌다, 고 생각한다.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발전이 약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약을 끊게 된다면 내 정신의 컨트롤타워에서 기쁨이는 실족해 죽고, 슬픔이만 남게 될지는 정말 모르겠다(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와 슬픔이처럼...).
약 때문인지 하루 종일 졸리기도 하는데, 멀쩡한 정신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할 정도로 졸리다. 그렇지만 전처럼 실낱같은 희망조차 못 느끼고 각성된 정신으로 사느니, 아무 생각 없고 조금 게으르고 졸려도 좋으니 지금처럼 '덤덤'하게만 지내고 싶다. 물론 부지런하고 졸리지도 않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다음 진료 때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봐야겠다.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질문.
"선생님, 저 요즘 잠도 잘 자고 기분 변화도 심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는데 약은 언제까지 먹어야 하나요? 제가 진짜 나았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어쩌면 나는 지금 빨리 약을 끊고 싶은 마음에 조급해하는 걸까? 내가 약 먹고 치료 중인, 어쨌든 환자라는 것이 싫은 걸까?
약 없이도 건전한 사고방식으로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어제의 나와 비교하자. 그것 역시 건전한 사고방식의 일환일 테니. 지금 이런 시간을 지나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