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1. 기록
지금은 오전 9시 반 정도 됐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좋다. 아침에 눈 뜨기 전 빗소리가 들리면 설렌다. 어둑어둑한 하늘, 비 냄새, 무엇보다 깨끗해질 것 같은 소리가 좋다.
마침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여주인공 이름은 ‘레인 카터’인데, 비를 뜻하는 단어인지 전혀 다른 철자를 쓰는지 알 길이 없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고 나 자신조차 쓸 일 없는 내 영어 이름 Anne을 이참에 Rain으로 바꿨다(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만, 혼자 신이 남). 굳이 유명하지 않은 소설 속 여주인공 이름을 딴 건, 내가 비 오는 날을 참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여기서 깨달았기 때문이고, 또 그 책 표지의 여자 얼굴이나 시든 꽃이 자아내는 예스러운 분위기에 끌려서이다. 나는 오래된 것들이 좋아졌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 몇 년도 발행인지, 발행 연도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책이 출판된 뒤 지나온 역사를 생각하면 신기하다. 그해에 나는 뭐 했는지, 혹은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를 회상하는 것이다.
병동의 생활은 아주 단순하다. 핸드폰이 없으니 복잡해질 일이 없는 것 같다. 입원 전, 머리와 마음이 혼자 시끌벅적할 때 종종 폰을 꺼뒀다. 그게 맞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종종, 자주 꺼두자.
여기에서 생활. 밥, 약을 시간에 맞춰 먹어야 하는 걸 빼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건지는 오롯이 내 몫. 첫날 입원하자마자 미친 듯이 잠이 쏟아지고 두통마저 도져서 동그란 약 하나 받고 주는 밥 다 먹고, 빌려온 책 읽다가 거의 잠만 잤다(공기 중에 수면제가 떠도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음). 2~3일 차엔 이곳의 유일한 운동기구인 실내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이곳엔 단 1시간 걸을 곳조차 없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나마도 없는 다리 근육이 약해질까 싶어 시작했다.
3일 차부터 자전거로 하루 25km씩 매일 탔다. 체력이 달려서 한 번에는 못 타고 하루에 나눠 탔다. 대부분 5km씩. 내 하루 일정(정해진 것)은 아래와 같다.
07:30경 아침식사
혈압・체온 측정
이후 자유시간 5H
12:30경 점심
14:00-15:00 병동 프로그램(간단한 활동들)
자유시간 4-5H(주말)
17:30경 저녁
혈압・체온 측정
자유시간 3-4H
21:00경 약 복용/취침.
자전거는 자유시간 14시간 중 쪼개서 25km 타는데, 시간으로 치면 1시간 45분 정도밖에 안 되나 너무 힘들다(칼로리로 따지면 5km당 75 cal이니까... 375? 밖에 안 돼?! 계산 오류이길)
머리를 말릴 수 없어 저녁 전에 계획한 운동을 마치고 샤워를 해야 잘 때 머리가 말라 있다. 이렇게 운동을 해도 시간은 남는다. 내가 여기서 읽은 책이, 지난 몇 년간 읽은 책만큼은 될 거다.
입원 시 도서관에서 책 4권을 빌려왔었다.
①말그릇- 김윤나
②법륜 스님의 금강경 강의
③니체-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아마 이 책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거일 듯)
④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① 빼고는 페이지 수가 600~700p인데 어찌나 시간이 남아도는지 4일 만에 다 읽고, 여기 비치된 책 중 ‘원미동 사람들’도 같이 ‘끝냈다’.
이곳의 책꽂이 한 칸의 길이는 내 팔 한 짝 정도의 길이인데, 지금까지 읽은(퇴원 전까지 읽고 싶은) 책을 차례로 꽂아놨더니 서가의 절반쯤 차지한다. 그만큼 여기는 시간이 많다. 바깥만큼은 아니어도 시간 활용의 자율성도 커질 수밖에 없다.
다음은 병원에 비치된 책 중 내가 읽은 것들.
1 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2 라플라스의 마녀- 히가시노 게이고
3 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 나카노 교코
4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에쿠니 가오리
5 (이야기로 보는 TV 광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정혜자
6 내 안의 행복을 찾아서- 마하트마 간디
7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8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신경숙
9 인연- 피천득
10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김혜남
11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도종환
12 내 부엌으로 하루키가 걸어 들어왔다- 부엌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모임(代 오카모토 노부카츠) 1・2권
13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곰돌이 푸 원작
14 살며 사랑하며- 주드 데브르
15 낯선 여름- 구효서
16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신경림
17 나를 사랑하는 시간 슬로 러브- 도미니크 브라우닝
18 진짜 여름- 사기사와 메구무
19 일요일의 석간- 시게마츠 키요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