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e Than Fictions_시인과 공대생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by 식충


또래 머슴애들보다 더 선머슴 같던 계집애 하나가 같은 과에 있었다. 인생 뭐 있나, 시큰둥한 마인드에 만사 떨떠름한 표정까지 비슷했던 녀석과 나는 달리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주 붙어 다니는 일이 많았다. 강의를 빼먹고 우리는 당구를 치러가거나 피시방에 가거나 캠퍼스 잔디밭에 주저앉아 소주잔을 기울였고 그것도 지겨우면 시내 한복판을 홈리스 마냥 목적도 없이 어슬렁거리다 에어컨 빵빵한 대형서점에 기어들어가 독서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평소처럼 별 볼 일 없이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각자 멋대로 서가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는데 한편에서 과하게 가슴 후비는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책을 들고 페이지를 넘기는데 한 권에 빼곡한 야무진 글귀들. 그 중 타이틀과 같은 이름의 시 한편이 유독 인상 깊어 몇 번을 되새김하다가 녀석을 불러세우고 뵈주었다. 잠자코 끝까지 한편을 다 읽더니 저도 보는 눈이 있다고 또 맘에 든단다. 즉석에서 책을 사들고 나와(한 권만 사서 나는 노트에 수기로 옮겼다) 누가 먼저 38행의 그 시를 완벽하게 암송하나 내기를 하고 담배 한 보루를 걸었었다.


막 고등학교 담장을 빠져나와 세상에 얼굴 반쪽 빠꼼히 내밀고서 처음 상경한 촌놈마냥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던 그 시절, 그 한 줄 글귀가 왜 그리도 가슴에 와 닿던지. 사람도 사랑도 기대했던 것보다 실망스럽고 꿈꾸었던 것보다 보잘 것 없음을 처음 알고 먹먹했던 스무 살 가슴에 그것은 정말이지, 어떤 위로보다 더 의지가 되는 한마디였다. 등굣길에 만나면 우리는 공과대학으로 가는 길 내내 실성한 사람마냥 중얼중얼 시를 읊었고 강의가 없는 날은 대낮부터 주점 구석에 엎어져 술에 취해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또 시를 외워대곤 했다.


버라이어티한 비트로 뛰어대던 그 때 그 가슴과 마지못해 뛰는 듯 지리하게 한 박자인 지금 이 가슴이 같을 리 만무하지만 무뎌진 가슴이라도 주야장천 후벼파이는 날은 별 수 없는 법. 요즘도 가누기 힘든 마음 의지할 곳 없을 때면 참호에서 병사가 애인 사진을 꺼내보듯 그 한 구절 조용히 되뇌며 자신을 추스르곤 한다.


P.S

너도냐.



20150903

食蟲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 재 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섭섭함 버리고 이 말을 생각해보라.
-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는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뵈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넘어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김재진_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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